신라는 기원전 57년 박혁거세가 건국한 나라로서, 세습 왕권과 국가통일이 고구려나 백제에 비해 늦은 편이었습니다. 4세기 후반 내물왕대에 이르러서야 지금의 경상북도 일대를 통합해서 중앙 집권 국가로 발전하였습니다. 6세기 초 지증왕대에는 국호를 '신라'라고 확정했고, 왕의 칭호도 '마립간'에서 '왕'이라고 바꾸었습니다. 6세기 전반 법흥왕대에는 율령을 반포하고 백관의 공복을 제정해서 귀족을 관료로 등급화 시켰는데요. 이는 복식사적으로 볼 때 의미 있는 사건이다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이 시기에 불교를 공인하였고, 영토 확장에도 힘을 기울여서 김해 지역의 금관가야를 정복했습니다. 6세기 중반 진흥왕은 신라의 전성기를 가져온 정복군주인데요. 화랑도를 국가조직으로 개편해서 정복사업의 토대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고령 지역의 대가야를 정복하였고, 이후 함흥지역까지 진출해서 옛 옥저와 동예의 땅을 차지하는 등 신라가 삼국의 주도권을 장악하는 계기를 마련하였습니다. 그리고 이후 신라는 당과 연합해서 결국 고구려와 백제를 멸망시키고, 676년 삼국을 통일하게 됩니다.
다음으로는 신라의 복식자료인데요. 신라의 복식을 알 수 있는 자료로는 중국과 한국의 역사서들, 신라 왕릉과 유적지의 발굴 유물들, 그리고 회화 자료 이런 것들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서 특히 왕릉 출토 유물들은 신라의 장신구 문화를 이해할 수 있는 대표적인 자료라 하겠습니다. 자 그러면 여러분, 지금부터 신라 의복의 종류와 형태에 대해서 함께 공부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신라 복식에 대한 문헌 기록을 먼저 살펴보겠습니다. 『구당서(舊唐書)』 동이열전(東夷列傳) 신라(新羅)에 의하면, “의복은 대개 고구려, 백제와 같다. 그러나 조복(朝服)은 백색을 숭상한다. ”라고 되어 있습니다. 『신당서(新唐書)』 동이열전 신라에는 “남자는 갈고(褐袴)를 입고 부녀는 장유를 입는다. ”라고 되어 있습니다. 또 『양서(梁書)』 제이 열전(諸夷列傳)과 『남사(南史)』 이맥 열전(夷貊列傳) 신라에는 “관(冠)을 유자례(遺子禮), 유를 위해(尉解), 고(袴)를 가반(柯半), 화(靴)를 세(洗)라 한다.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법흥왕대에 제정된 백관 공복 제도가 자세히 나와 있는데요. 진골은 자의, 6두품은 비의, 5두품은 청의, 4두품은 황의를 착용했는데요. 또 1~9등급까지 아홀을 들었다고 합니다. 2~3등급은 금관, 4~5등급은 비관, 6~12등급까지는 조영을 착용했다고 했습니다. 『삼국유사(三國遺事)』의 법흥왕대의 기록에는 또 “방포(方袍)”라고 하는 의복 명칭이 등장하기도 합니다. 한편, 『삼국사기(三國史記)』의 문무왕대 기록에는 여성의 “금군(錦裙)”이 등장하는데요. 이 금군은 고대의 화려한 문 직물인 금(錦)으로 만든 치마를 말합니다. 이상에서 신라 남자의 의복은 고구려, 백제와 같이 유와 고(袴)가 기본이며, 유를 '위해', 바지를 '갈고' 또는 '가반'이라고 불렀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 신라에는 공복 제도가 있어서, 4가지 색상의 옷과 관과 홀 이런 것들로 신분을 구별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신라에서는 조복으로서 백색을 숭상했다고 하는 점이 고구려, 백제와는 약간 다른 점이었던 것 같습니다. 왕과 귀족 등 고위 계급은 고구려, 백제와 유사하게 포(袍)를 착용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리고 신라 여자의 의복은 고구려, 백제와 유사하게 장유와 군(裙) 차림이 기본이었습니다.
다음으로 회화와 유물 자료에서 신라 의복을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신라 남자의 기본 의복입니다. 이 두 유물들은 신라의 기마인물형 토기인데요. 주인과 하인으로 명명하기도 하고, 혹은 계급의 차이가 나는 것이라고도 합니다. 왼쪽의 주인상은 관모를 쓰고 있고, 상의는 착수형 소매에 엉덩이까지 닿는 길이의 유를 입었으며, 하의는 갑옷의 하의 부속 구로 추정되는 옷을 착용하고 그 아래에 바지인 고를 입고 있는 모습입니다. 오른쪽의 하인상은 머리에 상투를 틀고 있고, 상의의 모습은 정확하지 않지만, 하의에 통이 좁은 고를 입고 있는 모습입니다. 주인상에 비해 간략한 옷차림이죠. 지금 보시는 토우는 경주 황남동에서 출토된 부부상 가운데 남자인데요. 줄무늬 또는 바지 주름으로 추정되는 세로 선이 표현되어 있으면서 또 바지 부리를 약간 오므린 형태의 고를 착용한 모습을 보실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신라 남자의 복식을 살펴보겠습니다. 「왕회도」에 그려진 신라 사신인데요. 관모를 쓰고 있고, 소매가 길면서 약간 넓은 통수 소매의 유를 입고 있습니다. 허리에 대를 매어서 유를 여몄을 것으로 추정되며, 바지 부리를 오므리지 않은 통이 넓은 고를 착용한 모습입니다. 장식으로는 깃과 수구, 그리고 밑단과 바지 부리에 선을 넓게 댄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 부조는 경주 단석산 바위에 새겨진 공양 인물상인데요, 두 인물이 고깔 모양의 변형모를 쓰고 있습니다. 그리고 엉덩이를 덮는 길이의 유를 입었으며, 그 위에 대를 매었습니다. 하의로는 바지 부리를 오므린 형식의 통이 넓은 고를 착용한 모습입니다. 지금 보시는 부조는 이차돈 순교비에 새겨진 인물인데요. 직령 깃의 유를 입고 있고 허리에 대를 매었고, 또 바지 부리를 오므린 형식의 매우 통이 넓은 바지를 착용한 모습입니다. 이상에서 신라 귀족 남자의 의복은 소매통이나 바지 넓이가 평민에 비해서 넓었다는 사실을 추정할 수 있습니다. 신라 여자의 기본 의복은 고구려, 백제와 유사하게 장유와 군(裙) 차림이었습니다. 이 토우는 경주에서 출토된 것인데요, 장유를 입고 있고 허리에 대를 맨 모습입니다. 그리고 하의로는 치마를 입고 있습니다. 지금 보시는 토우도 신라의 것인데요, 경주 황남동에서 출토된 부부상 가운데 여자입니다. 엉덩이를 덮는 길이의 장유와 넓은 세로선이 있는 발목 길이의 치마를 입고 있습니다. 이 치마의 세로선은 아마도 줄무늬가 아닐까 추정됩니다. 다음으로는 신라의 머리 모양입니다. 『신당서(新唐書)』 동이열전(東夷列傳) 신라(新羅)에 따르면, “부녀는 분을 바르거나 눈썹을 그리지 않으며 아름다운 두발을 머리에 두르고 구슬과 비단[珠綵]으로 꾸민다. 남자는 머리를 깎아 팔고 흑건(黑巾)을 쓴다. ”라고 되어있습니다. 즉, 부인의 머리 모양은 머리를 머리카락으로 두른 후에 구슬과 비단으로 장식한 얹은머리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 남자가 머리를 깎아서 팔았다는 기록으로 볼 때, 당시에 가체머리도 있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남자는 이 기마인물상에서 보시는 것처럼 상투를 틀고 이마에 띠를 둘렀습니다. 또한 「왕회도」의 신라 사신처럼 반 묶음으로 머리를 묶고 나머지는 자연스럽게 풀어 내리기도 했습니다. 신라의 관모로는 변형모, 조우관, 금관, 흑건, 책 이러한 것들을 들 수 있는데요. 앞서 문헌기록에서 잠깐 말씀드린 바와 같이 신라에서는 관(冠)을 유자례(遺子禮)라고도 했는데요. 이 유자례의 정확한 형태는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공양 인물상과 경주 황남동 출토 남자 토우의 모습에서 변형모를 볼 수가 있습니다. 약간 구부러진 모습으로 봐서 이 두 변형모는 아마도 가죽이나 직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닐까 추정됩니다. 기마인물형 토기의 주인상이 착용하고 있는 이 관모도 변형 모인데요. 이것은 금속과 같이 단단한 재료로 제작된 것으로 보입니다. 아마도 변형 모의 재질이 다양했다는 사실을 추정할 수 있습니다. 조우관에 대해서는 『삼국유사(三國遺事)』 귀축 제사(歸竺諸師)라는 항에 기록이 있는데요. “신라는 계신을 공경해서 높이기 때문에 관에 깃을 올려서 장식한다. ”라는 내용입니다. 지금 보시는 토우에서 머리 위로 2개의 수직 뿔이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요. 아마도 관의 양 옆에 조우를 장식한 것을 표현한 것이 아닐까 추정됩니다. 신라의 금관은 대륜식 입식관의 형식인데요, 대표적 유물로서 금관총에서 출토 금관을 들 수 있습니다. 이 금관총 금관은 외관과 내관, 그리고 새깃형의 관장식으로 구성됩니다. 지금 보시는 것이 외관인데요. 이 외관은 관테 위에 3개의 나뭇가지 모양 장식과 2개의 사슴뿔 모양 장식을 붙여서 세운 그런 모양입니다. 관테의 가장자리에는 송곳과 같은 날카로운 도구로 찍어서 만든 줄무늬가 표현되어 있습니다. 관테의 양옆에는 아래로 늘어뜨린 수하식이 달려 있고, 외관 전체에 곡옥과 달개를 달아서 화려하게 장식한 그런 모습입니다. 지금 보시는 것은 이 외관의 안쪽에 착용하는 고깔 형태 내관의 옆모습인데요. 다양한 무늬가 투조 장식된 금판 여러 장을 결합해서 만든 것입니다. 내관의 앞부분은 관장식을 꽂을 수 있도록 고안되어 있고, 아래쪽의 가장자리 부분은 머리에 맞도록 완만한 곡선으로 살짝 들려 있습니다. 이 내관은 머리에 쓰고 끈을 턱에 묶어서 고정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지금 보시는 것은 새깃형의 관장식인데요, 투조 장식된 3장의 금판을 접합해서 만든 것입니다. 내외면에 둥근 달개가 아주 많이 달려 있죠? 그리고 가운데 금판의 윗부분을 자세히 보시면 당초 줄기처럼 간략화된 용무늬가 비대칭으로 표현된 것도 보실 수 있습니다. 한편, 신라의 흑건에 대해서는 앞서 머리 모양에서 공부했듯이 『신당서(新唐書)』 동이열전(東夷列傳) 신라(新羅)에 남자가 흑건(黑巾)을 쓴다라고 한 기록에서 그 존재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다음은 신라의 책인데요, 지금 보시는 「왕회도」의 신라 사신이 머리에 쓴 관모를 책으로 보는 견해가 있습니다. 이 책은 건보다 재질이 단단해 보이고 형태가 잡혀 있는 외관이 특징인 관모입니다. 신라의 귀걸이는 고구려와 마찬가지로 세환식과 태환식으로 나뉩니다. 지금 보시는 귀걸이는 태환식인데요. 신라 귀걸이 제작 기술의 정점과 신라 장신구 문화의 화려함을 잘 보여주는 명품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작은 금 알갱이와 금실을 이용한 정교한 누금세공(鏤金細工) 장식이 대단히 돋보이는데요. 중간식은 작은 고리를 연결하여 둥글게 만들었고, 그 가장자리에 37개의 나뭇잎 모양의 달개를 달았습니다. 그리고 맨 아래쪽에는 심엽형의 수하식이 달려 있습니다. 지금 보시는 귀걸이는 세환식인데요. 조금 전에 보신 귀걸이의 중간식과 수하식, 이러한 것들과 비슷한 모양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장식이 좀 더 단조로운 형태죠. 지금 보시는 귀걸이는 중심고리에 장식 줄이 2개 달린 형식인데요. 귀걸이 가운데에는 이처럼 장식 줄이 2개 이상 달린 그런 유형도 있었습니다. 이러한 2줄 이상의 장식 줄이 달린 귀걸이는 착용했을 때 그 흔들리는 모양이 더욱 다채로운 느낌을 주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신라의 목걸이는 착용방법에 따라 목에 거는 경식과 가슴까지 장식하는 경 흉식으로 분류할 수 있으며, 또 목에 몇 줄을 거느냐에 따라서도 나눌 수 있습니다. 고분 출토품은 구슬 목걸이가 많은데요. 곡옥, 환옥, 관옥, 대추 옥, 다면 옥 이러한 각종 옥과 금속 환을 연결해서 다양한 방법으로 착용했습니다. 대추 옥이라는 것은 그 모양이 대추처럼 길쭉하게 생긴 옥을 말하고, 다면 옥은 여러 개의 평면이 모인 다면체 모양의 옥을 말합니다. 지금 보시는 목걸이는 황남대총 남분에서 출토된 것인데요. 묻힌 사람의 목에 걸린 채로 그대로 발굴되었다고 합니다. 맨 아래쪽에 달린 금제 곡옥을 중심으로 좌우에 각각 3개씩 속이 빈 금구슬이 있고, 그 사이를 금사 슬로 연결한 그런 형태입니다. 지금 보시는 목걸이는 태환식 귀걸이의 중간식에 사용되는 작은 고리 접합 구체를 여러 개 연결해서 목걸이 형태로 만든 것인데요. 작은 고리에는 여러 개의 심엽형 달개가 매달려 있습니다. 목걸이의 맨 아래쪽에는 녹색의 비취제의 곡옥이 달려 있는데요. 이러한 목걸이는 아마도 최상류 층의 것이 아니었을까 이렇게 추정하고 있습니다. 지금 보시는 것은 재질과 형태, 크기와 색상이 다양한 구슬들이 연결된 목걸이입니다. 마 노제의 붉은 다면 옥과 푸른 환옥들, 그리고 1개의 벽옥제 관옥으로 목 부분을 만들고, 그 아래로 파란 유리제의 환옥, 그리고 투명한 수정제의 대추 옥, 붉은 곡옥 이런 것들이 각각 1개씩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 가운데 특히 파란 유리옥의 표면에는 이목구비가 뚜렷한 사람의 얼굴, 그리고 오리와 꽃나무 무늬 이런 것들이 상감되어 있는데요. 이로써 당시의 뛰어난 유리 공예 기술과 또 문화 교류까지 확인할 수 있겠습니다. 신라에서는 최고 지배층의 무덤인 경우에 금이나 은으로 만든 팔찌가 예외 없이 착장 된 상태로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신라의 팔찌는 남녀 공용으로 양팔에 착용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며, 한 번에 여러 개의 팔찌를 차기도 했을 것으로 추측되고 있습니다. 또 재료로 볼 때는 금제, 은제, 동제, 옥제 팔찌 등이 있으며, 형태는 간단한 톱니식, 상감 돌기식, 금판 환 식 이러한 것들이 있습니다. 지금 보시는 팔찌는 상감 돌기식인데요. 납작한 면의 바깥쪽에 각각 59개의 돌기를 내어서 하나하나에 옥을 상감했습니다. 그리고 돌기 좌우의 면에는 용들이 입을 벌리고 서로 다른 용의 꼬리를 물려는 모습이 생동감 있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신라의 뛰어난 세공 기술을 엿볼 수 있는 그런 유물입니다. 이 팔찌는 금판 환 식인데요. 2개의 금판(金板) 표면에 금실과 금 알갱이로 여러 도형을 표현하고 있고, 여기에 보석류를 감입한 금판을 덧대서 둥글게 말아 만든 것입니다. 신라의 허리띠는 대표적인 것이 금속제 허리띠인 과대입니다. 지금 보시는 유물은 황남대총 북분에서 출토된 금제 과대인데요. 띠고리와 띠 꾸미개, 띠 끝장식, 띠드리개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띠 꾸미개는 넝쿨무늬를 투조해서 만든 방형 붙임판에 심엽형 고리가 매달린 그런 형식입니다. 심엽형 고리에는 또 둥근 달개를 매달아서 장식성을 더했습니다. 드리개는 타원형과 방형의 금판을 교대로 연결하고, 끝에는 여러 장식물을 달았는데요. 한번 보시면, 곡옥, 숫돌 모양의 장방 형판, 물고기 모양판, 장도(裝刀) 형, 투조 양각(兩脚) 형, 금침(金針) 형 이러한 다양한 장식물들이 보이고 있습니다. 이 유물은 금관총에서 출토된 금제 과대인데요. 얇은 금판으로 만든 40매의 띠 꾸미개, 그리고 양 끝에 각 1개씩의 띠고리와 띠 끝장식, 그리고 17줄의 띠드리개로 구성되었습니다. 드리개는 조금 전에 보신 황남대총 과대와 유사하게 타원 형판과 방형판을 교대로 연결해서 만들었는데요. 역시 맨 아래에 장식들이 보입니다. 약통형, 숫돌 모양의 장방 형판, 또 유리구 장식, 곡옥, 물고기 모양판, 투조 규(圭) 형, 투조 양각형 이러한 모양들이 보이고 있습니다. 특히 숫돌 모양의 장방 형판과 물고기 모양판, 곡옥 장식, 투조 양각형 이런 것들은 거의 모든 금제 과대에서 공통적으로 볼 수 있는 장식이라 하겠습니다. 허리띠에 각종 물건을 매다는 이러한 풍습은 원래 북방 유목민족의 풍습이었다고 합니다. 신라에서는 이처럼 다양한 허리띠 드리개로 장식화 되어 나타나고 있습니다. 신라의 과대는 고구려와 백제에 비해서 보다 발달된 형태라고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 신라의 신발은 신목이 있는 화(靴)와 신목이 없는 이(履)로 구분됩니다. 앞서 『양서(梁書)』 와 『남사(南史)』의 기록에서도 살펴본 바와 같이 신라에서 화는 세(洗)라고도 불렀는데요. 이 「왕회도」 신라 사신의 모습에서 화를 잘 볼 수 있습니다.
고신라 시기의 신발로서 이에 대한 기록은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통일신라시기 신발에 관한 기록에서 짚이나 베, 가죽이나 비단 이런 것들로 만든 '이'가 등장하고 있기 때문에 고신라 시기에도 이러한 재료들로 만든 이가 존재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한편, 신라의 여러 고분에서는 여러 가지 유형의 금동 식리가 출토되었습니다. 지금 보시는 것처럼 신발 바닥에 달개 장식이 달린 것도 있고, 신발 바닥에 각진 못이 달린 유형도 있습니다. 이 유물은 경주 식리총(飾履塚)에서 출토된 금동 식리 바닥인데요. 다른 신발과는 달리 주조기법으로 틀을 만들고 그 위에 도드라지게 무늬를 만들었습니다. 구슬 무늬, 불꽃 무늬, 연꽃무늬, 육각형의 거북등 무늬 이런 것들이 일정하게 배치되었는데요. 특히 거북등 무늬 안에는 귀면, 쌍조문, 사람 얼굴에 새의 몸을 지닌 상상의 동물, 또 기린, 날개 달린 물고기 이런 것들이 장식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무늬들은 무덤을 지키는 수호신으로서 불교적인 요소가 결합된 내세관이 표현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양식은 백제지역의 금동리 제작방법이나 무늬 배치와 유사하다고 합니다. 또한 연속된 거북등 무늬는 5~6세기 사산조 페르시아에서도 크게 유행했다고 하는데요. 중국에서는 후한(後漢) 시기 말기, 특히 북위(北魏)에서 널리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문화의 광범위한 국제 교류를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이상으로 신라의 복식에 대해 함께 공부해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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