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의 복식에 대해 공부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가야의 복식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역사적 배경 지식을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낙동강 하류의 변한 지역에 자리 잡은 6개의 가야연맹국가를 통칭해서 가야라고 합니다. 전기 가야연맹의 중심세력은 김해의 금관가야인데요, 김수로왕이 42년에 건국하였습니다. 가야연맹은 김해를 중심에 두고 지금의 경상북도 상주 지역에까지 걸쳐 있어서 그 판도가 적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산악지역이 많고, 백제와 신라의 협공과 일본의 규슈지역으로 힘이 분산되면서 통일된 고대국가를 건설하기는 어려웠습니다. 4세기 후반 백제 근초고왕의 공격을 받아서 남해안 지역의 가야국들이 백제에 통합되면서 가야의 주도권은 북쪽에 있는 고령의 대가야로 옮겨졌습니다. 5세기 후반에는 고령 지역의 대가야를 중심으로 후기 가야연맹 체제로 변환되었고, 6세기 초에는 백제, 신라와 대등한 관계로서 신라와 결혼 동맹을 맺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이후 신라 법흥왕대에 김해의 금관가야가 흡수되고, 또 진흥왕대에 이르러 대가야가 신라에 통합되면서(562) 가야연맹은 해체되기에 이르렀습니다. 가야의 복식문화를 이해할 수 있는 자료로는 『삼국유사』와 같은 문헌, 그리고 가야 고분과 유적지의 발굴 유물 자료들을 들 수 있겠습니다.
가야 의복의 종류와 형태에 대해 공부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가야의 복식에 대한 문헌 기록을 먼저 살펴보겠습니다. 『삼국유사』 가락국기에는 가야의 시조인 김수로 왕에게 아유타국, 즉 인도의 공주가 시집오면서 입고 온 물품 가운데 '능고(綾袴)'에 관한 기록이 있습니다. 가지고 온 물품 중에는 금수 능라(錦繡綾羅)와 의상 필단(衣裳疋緞), 금은 주옥(金銀珠玉)과 구슬로 된 장신구들에 관한 기록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 형태는 알 수 없지만, 김수로왕이 공주에게 의복과 비단(段)을 주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이상의 기록에서 볼 때 가야에서도 여자가 저고리와 바지와 치마를 입었음을 추측할 수 있고, 또 금, 수, 능, 라, 비단과 같은 그런 고급 견직물이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아마도 문화적 배경이 비슷한 신라와 거의 유사한 형태의 유(저고리)와 장유(긴 저고리), 고(바지)와 상(치마), 포 이러한 옷들을 착용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가야의 복식문화에서 가장 특징적인 요소는 갑주문화입니다. 가야의 대형 고분에서는 철제 갑주류가 다량으로 출토되었는데요. 두 유물에서 보시는 바와 같이 판갑이 주로 발견되었습니다. 이 판갑은 소찰 편을 연결하여 만드는 고구려식 찰갑과는 달리, 큰 철판을 결합해서 제작했기 때문에 유동성이 거의 없는 것이 특징입니다. 가야에서는 종장판 판갑, 횡 장판 판갑, 그리고 삼각판 판갑 이러한 다양한 양식의 갑옷과 투구가 제작되었다고 합니다. 지금 보시는 기마인물형 토기의 무사는 머리에 챙이 있는 투구를 쓰고 있는데요. 몸에는 갑옷을 또 입고 있습니다. 목을 보호하는 경갑도 착용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말에는 찰갑 형식의 마갑을 입혔습니다. 가야의 관모는 신라와 마찬가지로 변형모, 조우관, 그리고 금관 이런 것들로 구분됩니다. 가야 변형 모의 기본 형태는 신라의 변형모와 유사하고, 단독으로 사용하거나 조우를 장식해서 착용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금관은 주로 대가야 지역에서 출토되었는데요. 지금 보시는 유물이 고령 출토품으로 전하는 금관입니다. 신라의 금관에 비해서 간략한 모습인데요. 자연스러운 풀잎 모양의 세움 장식이 특징입니다. 지금 보시는 것은 부산 복천동에서 출토된 금동 관인 데요, 시기적으로 초기 단계의 관이라 합니다. 세움 장식이 3단의 나뭇가지 모양이고, 가장 윗부분의 보주형 장식에는 인동 문을 도안화 한 삼엽문이 표현되어 있어서 고구려 금속공예와의 관련성도 엿볼 수 있습니다. 이 유물은 고령 지산동 고분군에서 출토된 금동 관인 데요, 표면에만 도금이 되어있습니다. 그리고 관테에는 광배(光背) 모양의 넓은 세움 장식이 하나 부착되어 있습니다. 윗부분은 연꽃 봉오리 모양으로 장식이 되어있습니다. 세움 장식의 좌우에는 꺾인 가지 모양의 작은 세움 장식이 못으로 고정되어 있는데요. 이 작은 세움 장식의 끝부분도 역시 작은 연꽃 봉오리 모양입니다. 또한 중앙의 세움 장식에는 연속점 무늬와 물결무늬 등을 X자로 그리면서 또 수평선을 넣어서 3줄의 교차 선도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선들은 면의 단조로움을 깨면서 선과 면의 대칭 미를 잘 보여주고 있다고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 신라의 전형적인 세움 장식과는 다른, 가야관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유물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가야의 귀걸이는 대가야 지역에서 주로 출토되었는데요. 중심고리가 가는 세환 식이 주로 발견되었습니다. 두 쌍의 가야 귀걸이에서 보시는 바와 같이 중간식으로는 속이 비어있는 구체형 장식이 주로 사용되었는데요. 중간식의 아래로는 사슬 모양의 연결 금구가 이어져 있고 원추형 또는 심엽형의 수하식이 매달려 있습니다. 이러한 양식 이외에도 신라와 백제 문화권의 귀걸이와 유사한 모양도 발견되고 있습니다.
앞서 『삼국유사』 가락국기의 기록에서 금은주 옥과 구슬로 된 장신구들에 대한 내용을 언급했었는데요. 가야의 출토품에서도 유리, 수정, 옥과 호박, 마노 이런 것들로 만든 다양한 구슬 목걸이들이 출토되어서 문헌의 내용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지금 보시는 목걸이들은 다양한 색상, 또는 다양한 크기의 구슬들을 연결해서 만들었는데요. 가운데에 곡옥을 배치해서 늘어뜨린 형태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유리옥 목걸이인데요. 길이를 길게, 또는 여러 번 감아서 목에 늘어뜨리는 형식으로 착용했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가야의 팔찌로는 비교적 단순한 형태의 금팔찌, 은팔찌, 옥팔찌 이런 것들이 있습니다. 지금 보시는 유물은 표면에 간단한 톱니 모양이 표현된 금팔찌입니다. 지금 보시는 두 은팔찌는 삼국시대에 유행한 화려한 은제 장신구 중에 일부인데요. 표면에 각각 둥근 돌기 모양과 톱니 모양이 표현되어 있습니다. 이들 팔찌는 5세기 후반 무렵에 만들어진 것인데요. 당시 가야 귀족들의 복식문화를 짐작해 볼 수 있는 좋은 자료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가야의 허리띠는 백제나 신라와 그 구성이 유사합니다. 지금 보시는 유물은 은제 허리띠 꾸미개와 띠고리인데요. 아마도 여기에 띠드리개가 달렸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지금 보시는 것처럼 허리띠의 드리개 부분만 남아 있는 유물도 있습니다. 가야의 은제 과대는 신라 과대와 비교해봤을 때 띠꾸미개와 띠드리개의 양식이 거의 유사하지만 드리개의 종류나 수가 적은 편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마지막으로 가야의 신발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가야의 신발에 대해서는 기록이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변국인 신라, 백제와 유사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요. 지금 보시는 기마 인물형 토기의 무사는 신목이 있는 신발인 화(靴)를 신은 것으로 보입니다. 또한 가야의 유물 가운데에는 이와 같은 신발형 토기가 있는데요, 신목이 없는 이(履)의 모습입니다. 또 지금 보시는 것처럼 짚신 모양 토기도 발견되어서 당시에 짚신과 같은 신발도 신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지금까지 가야의 복식에 대해 공부해 보았습니다.
조선시대 왕의 관복, 조복, 상복 (0) | 2022.07.28 |
---|---|
신라 시대의 복식에 대하여 (0) | 2022.07.28 |
철기시대 옥저, 동예, 삼한의 복식 (0) | 2022.07.27 |
철기시대 고조선, 부여, 고구려의 복식 (0) | 2022.07.27 |
청동기시대 한국인의 의생활 (0) | 2022.07.26 |
댓글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