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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의 머리 모양과 관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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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의 머리 모양과 관모

고구려의 머리 모양과 관모
고구려의 머리 모양과 관모

먼저 머리 모양을 살펴보겠습니다. 고구려인의 머리 모양은 고분벽화를 통해서 알 수 있는데요. 대략 다섯 가지 유형으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드림 형입니다. 이 드림형 머리는 그림에서 보시는 것처럼 어깨 길이 정도의 머리카락을 자연스럽게 뒤로 드리운 형식입니다. 주로 소년들의 머리 모양이었습니다. 두 번째는 묶음형입니다. 묶음형 머리는 한 갈래 또는 두 갈래로 머리카락을 정리해서 묶은 형식으로서, 주로 결혼하지 않은 미혼 남녀의 머리 모양이었습니다. 한 갈래 묶음 머리는 다시 두 가지 형식으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요. 하나는 머리카락을 전부 뒤통수로 모아서 하나로 낮게 묶는 형식입니다. 이 왼쪽 그림에서 보시는 것이 바로 그러한 형식입니다. 다른 하나는 뒤통수로 모은 머리를 위로 한번 접어 올려서 다시 묶음으로써 머리카락 끝이 위로 뻗치게 한 형식입니다. 다음으로는 두 갈래 묶음 머리가 있는데요. 이 머리는 그림에서 보시는 것처럼 머리카락을 좌우 양 갈래로 나누어 귀 위쪽에서 묶은 형식입니다. 무척 귀여운 머리형이죠. 세 번째 유형은 상투형입니다. 이 상투형은 그림에서 보시는 것처럼 정수리 위로 두 발을 모아서 상투를 만드는 형식인데요. 주로 기혼 남자의 머리 모양이었습니다. 그런데 평양 근처의 일부 지역에서는 기혼 부인의 머리 모양으로 상투머리가 일시적으로 유행하기도 했는데요. 여자의 상투 머리는 이 두 그림에서 보시는 것처럼 상투 둘레나 위쪽에 가발을 더하는 형식으로서, 이것은 주로 중국 한족 여성의 머리 양식이었다고 합니다. 네 번째 유형은 얹은머리형입니다. 왼쪽의 두 그림에서 보시는 것 같이 얹은머리는 머리카락을 위쪽으로 모아 올린 후에 머리 둘레에 둥글게 감아서 서리는 그러한 형식입니다. 고구려 기혼 여자의 가장 보편적인 머리 모양이었습니다. 그런데 다소 독특한 모양의 얹은머리도 있었는데요. 맨 오른쪽 그림에서 보시는 것처럼 머리카락을 위쪽으로 모아 올린 후 머리 정수리 부분에서만 둥글게 감은 것 같은 그러한 머리 모양도 보입니다. 마지막 유형은 삭발형입니다. 그림에서 보시는 것처럼 이 삭발형은 머리카락을 매우 짧게 자르는 형식인데요. 주로 승려의 머리 모양이었다고 합니다.

고구려의 관모

다음은 고구려의 관모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고구려의 복식 가운데 가장 다양한 종류를 보이는 것이 바로 관모입니다. 고구려 사람들은 신분 지위의 고하에 따라서 서로 다른 종류의 관모를 썼는데요. 이 관모는 여자들은 거의 사용하지 않았고, 대부분 남자들이 착용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관모의 종류와 형태 및 특징에 대해 하나씩 공부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책'입니다. 이 고구려의 책에 대한 형태에 대해서는 학자들 간 다소 이견이 있습니다. 그러나 대체로 고구려의 책은 중국의 책과 비교했을 때 형태가 다른 부분이 있었다는 측면에서는 어느 정도 공통된 견해를 보이고 있습니다. 고구려 책에 관한 기록은 『삼국지』가 대표적인데요. 『삼국지』 위서 동이전 고구려에 의하면 “대가와 주부는 머리에 책을 쓰는데 그 모양이 (중국의) 책과 비슷하나 뒤[餘/後]가 없고, 소가는 절풍(折風)을 쓰는데 그 모양이 변(弁)과 같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기록에서 3세기 무렵 고구려의 책은 그 모양이 절풍과는 다른, 상위 관인의 관모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기록을 토대로, 지금까지 많은 학자들이 고구려 고분벽화에서 고구려 책의 형태를 찾아내기 위한 연구를 시도했습니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일치된 견해를 보이지 못하고 있습니다.

고구려 책의 형태에 관한 학계의 의견

따라서 이 수업에서는 고구려 책의 형태에 대한 학계의 대표적 견해 두 가지를 소개하는 정도로 내용을 정리해 보고자 합니다. 첫 번째는 평양지역의 뒤가 솟은 모양의 관모를 고구려의 책이다라고 보는 견해입니다. 당시 중국에서도 고구려와 비슷한 시기, 즉 한나라부터 위진 시대에 이르기까지, 이 책이라는 관모가 널리 사용되었습니다. 중국과 고구려에서 모두 책이 사용되었는데요. 고구려의 책은 중국의 책과 비슷하지만 뒷부분이 없다고 했기 때문에, 이러한 기록에 부합되는 형태로서 뒤가 솟은 관모를 고구려의 책으로 보는 견해입니다. 이 뒤가 솟은 관모는 두 종류가 있는데요. 하나는 왼쪽 그림처럼 관모 뒷부분의 높이가 앞부분의 두 배 정도에 달할 만큼 뒤쪽이 높이 솟아올라있는 그러한 모양입니다. 다른 하나는 오른쪽 그림처럼 관모 뒷부분이 솟아 있으면서 또 두 갈래로 나뉜 채 앞쪽으로 약간 구부러져 있는 그러한 형태입니다. 두 그림에서 보시는 이러한 책은 주로 4세기와 5세기 평양 지역의 고구려 벽화에서 볼 수 있는 관모인데요. 중국의 책과 형태가 유사한 부분이 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다음으로 고구려 책의 형태에 관한 두 번째 견해는 집안 지역의 방형(方形) 관모를 고구려의 책으로 보는 견해입니다. 이 왼쪽 그림은 장천 1호분 남자의 방형 관모이고, 오른쪽은 무용총 묘주의 방형 관모입니다. 이 방형 관모는 머리에 직접 닿는 부분은 반구형이고 그 윗부분은 육면 체형으로 구성되어 있는 그러한 모양입니다. 관모에 달린 두 줄의 끈을 턱 아래에서 묶어서 머리에 고정시켰던 것으로 보이고, 이 모자의 색은 흰색이 대부분이지만 간혹 붉은색도 발견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방형 관모를 3세기부터 5세기까지 고구려의 상위 관인이 착용한 고구려 고유의 책으로 추정하는 견해입니다.

절풍

다음은 절풍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절풍은 『삼국지』 기록에 의하면, 변(弁)과 같은 모양의 관모를 말합니다. 즉, 고깔과 같은 모양의 관모인데요, 윗부분으로 갈수록 좁아지는 삼각형 관모에 끈이 달려있는 구조였습니다. 정수리 부분은 뾰족하다기보다는 약간 둥근 삼각형이었고, 크기는 상투를 가릴 정도의 크기였습니다. 이 절풍은 주로 흰색 가죽(자막이 맞음)으로 제작되었는데요. 아랫부분에는 검은색 테두리를 둘러서 깃털이나 기타 장식을 꽂는 용도로 이용되었습니다. 두 그림에서 절풍의 모습을 보실 수 있는데요. 왼쪽은 무용총 벽화에서 노래하는 사람이 쓴 모습이고, 오른쪽은 시종이 절풍을 쓰고 있는 모습입니다. 이처럼 절풍은 고구려 남자의 가장 보편적 관모였고, 또 관등이 없는 일반인의 착용이 허용되었던 그러한 관모였습니다. 다음은 조우 절풍에 대해 공부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조우 절풍은 절풍의 일종인데요, 절풍에 새 깃털을 장식한 관모입니다. 일반적으로 '조우관'이라고도 알려져 있습니다. 조우 절풍은 하위 관원이 절풍을 쓸 때 새 깃털을 장식해서 일반인과 구별하는 용도로 썼던 관모입니다. 두 그림에서 조우 절풍의 모습을 보실 수 있는데요. 왼쪽은 두 개의 깃털이 관모의 양 측면에 하나씩 부착되어서 위로 뻗은 모습입니다. 오른쪽은 더욱 크고 화려한 깃털이 관모의 한쪽 측면에 부착되어 뒤로 드리워진 모습입니다. 일반적으로 이러한 변형 관모와 조우 장식은 북방 유목민족 계통의 문화로 이해되고 있습니다. 또한 고구려, 백제, 신라와 가야의 공통적 문화요소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다음은 고구려의 또 다른 변형 관모인 소골(蘇骨)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소골에 대한 기록은 『북사』 열전 고려의 기록이 가장 대표적인데요. 이 기록에 따르면 “사람들은 모두 머리에 절풍을 쓰는데 그 모양이 변(弁)과 같다. 사인(士人)은 조우(鳥羽) 2개를 더 꽂는다. 귀한 사람의 관은 소골(蘇骨)이라 하는데 대부분 자색 라[紫羅]로 만들고 금은으로 장식한다.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북사의 내용 연대는 6세기 중반부터 7세기 초 무렵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따라서 이 시기에 소골이 새롭게 등장했다고 볼 수도 있는데요. 이 소골은 6세기 이후 새롭게 등장한 고구려 상위 관인의 관모로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소골의 구체적 형태에 대해서는 아직 정확한 결론이 내려진 바가 없습니다만, 고구려 고분벽화 가운데 개마총의 묘주와 신하의 관모를 소골이다라고 보는 견해가 있습니다. 이 오른쪽에서 보시는 그림이 신하의 관모인데요. 홍색의 변형모에 자색의 테두리가 넓게 둘러져 있고 그 위로 조우 두 개가 꽂혀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왼쪽 그림은 묘주의 관모인데요. 신하의 것보다 더 화려한 금속 느낌의 장식들이 이 관모에 부착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자색이 주를 이루는, 변형의 화려한 장식 관모를 소골이다라고 보는 견해가 있습니다.

무관

다음은 무관(武冠)입니다. 이 무관은 얇고 성긴 소재로 만든 커다란 상자형의 관모입니다. 무관은 내부에 흑색의 평상 책을 쓰고 그 뒤쪽의 위에 또 덮어쓰는 그러한 형태의 관모입니다. 무관 내부에 쓴 평상 책은 앞보다 뒤가 약간 솟은 모양인데요. 이 솟은 부분에 커다란 상자형의 관모를 덮으면 무관이 됩니다. 왼쪽 그림에서 무관의 정면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내부에 흑색의 평상책이 보이고 외부에 투명한 느낌의 관이 덮여 있는 모습입니다. 오른쪽 그림은 약 45도 측면에서 본 무관의 모습입니다. 정면보다 무관의 구조가 더 잘 이해되는 그러한 그림이죠. 이 무관은 중국에서도 착용되었는데요. 한 이후부터 위진시대까지 많이 썼던 관모입니다. 혜문관(惠文冠), 무변 대관(武弁大冠), 롱관(籠冠) 등 여러 가지 다른 이름으로 지칭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고구려 고분벽화에서는 4세기부터 5세기 사이 평양지역의 벽화에서만 등장하는 관모입니다. 이러한 형태의 관모를 무관으로 보지 않고 고구려왕의 '백라관(白羅冠)'으로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이 백라관은 고급 견직물의 일종인 '백색의 라직물로 만든 관'으로 이해될 수 있는데요. 학자에 따라서 지금 보시는 이러한 무관을 백라관으로 해석하기도 하고, 앞서 공부했던 소골과 같은 유형의 관모를 백라관으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입형 관모

다음은 입(笠)형 관모입니다. 입(笠)은 가장자리에 차양이 달린 형태의 모자를 지칭하는 말입니다. 고구려의 입에는 두 가지 유형이 있었는데요. 첫 번째 유형은 이 왼쪽 그림처럼 모자의 윗부분이 둥글고 가장자리에 넓은 차양이 달린 형태입니다. 두 번째는 오른쪽 그림처럼 모자 본체와 차양의 경계가 없고, 위에서 아래로 내려갈수록 점진적으로 넓어지는 그러한 형태입니다. 고구려의 입은 주로 평양지역의 벽화에서만 확인되고 있고 그 사례가 많지는 않습니다. 따라서 입이 고구려의 보편적 모자였다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한국 복식사에서 조선시대 갓과 유사한 형태의 관모가 처음 등장하는 시기가 이미 고구려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 간다라고 하는 측면에서, 고구려 입의 존재는 중요한 역사적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다음은 건(巾)에 대해 공부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건은 머릿수건을 의미하는데요. 고구려 남자와 여자 모두 건을 착용했습니다. 그림에서 보시는 것처럼 남자의 건은 검은색의 천을 머리에 두른 후 뒤통수로 모아서 묶은 형식입니다. 여자의 건은 이 두 그림에서 보시는 것처럼 두 가지 형식이 있었는데요. 첫 번째 형식은 흰색 천을 넓게 펴서 머리를 감싼 것으로 이러한 형태를 '건귁'이라 불렀습니다. 두 번째 형식은 흰색 천을 가늘고 길게 접어서 이마 위쪽에만 두른 형태입니다. 고구려 여자들은 남자들과 달리 머리에 쓰는 관모가 별로 없었습니다. 이러한 두 가지 유형의 건이 고구려 여자들의 주요 머리쓰개였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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