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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의 복식과 의복 종류 및 특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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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의 복식과 의복 종류 및 특징

백제의 복식과 의복 종류 및 특징
백제의 복식과 의복 종류 및 특징

백제는 기원전 18년 한강 유역의 토착 세력과 고구려 계통의 유이민 세력의 결합으로 성립되었는데요. 우수한 철기 문화를 보유한 유이민 집단이 지배층을 형성했습니다. 3세기 중엽 고이왕 때 16품의 관등제와 백관 공복을 제정해서 관료의 등급을 명확히 했고, 4세기 중반의 근초고왕 때는 백제의 전성기로서 대대적인 영토 확장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후 고구려의 강성으로 인해서 세력이 다소 약화되었는데요. 고구려 장수왕의 공격으로 한성이 함락되고 문주왕 때에는 금강유역의 웅진으로 도읍을 옮기게 되었습니다. 5세기 말 동성왕과 무령왕 대에 다시 사회가 안정되고 국력이 회복되었는데요. 그러나 6세기 전반 무렵 고구려의 압박에 다시 밀려서 수도를 옮기게 되었습니다. 성왕은 백마강 유역의 사비로 천도하고 국호를 남부여라고 바꾸었습니다. 천도 이후에 국가체제를 재정비했지만, 이후 660년 나당연합군의 침공을 받고 멸망하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백제는 고구려, 신라와의 긴장된 관계 하에서 약 680년이라는 오랜 역사와 문화를 영위한 나라였는데요. 의생활과 복식문화 측면에서도 귀한 유산을 남겼습니다. 백제의 복식문화를 이해할 수 있는 대표적인 자료로는 여러 종류의 중국 역사서들과, 왕릉과 백제 유적지의 출토 유물들, 그리고 백제 관련 회화 자료들이 있습니다.

백제 의복 종류

그러면 지금부터 백제 의복의 종류와 형태에 대해 공부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백제의 복식에 대해서는 중국 사서에 기록이 남아 있는데요. 『주서(周書)』 이역열전(異域列傳) 백제(百濟)에 따르면, “그들의 의복이 남자는 대략 고구려와 동일하였다. (중략) 부인의 옷은 포와 같으며[婦人衣似袍] 소매가 약간 넓다[而袖微大]. ”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양서(梁書)』 동이열전(東夷列傳) 백제(百濟)에 따르면 “복장은 고구려(高[句]驪)와 거의 같다. (중략) 모(帽)를 관(冠)이라 부르고, 유(襦)를 복삼(複衫), 고(袴)를 곤(褌)이라 한다. ” 라고 되어있습니다. 또 『구당서(舊唐書)』 동이열전(東夷列傳) 백제(百濟)에는, “왕은 대수자포(大袖紫袍)에 청금고(青錦袴)를 입고, 오라관(烏羅冠)에 금화(金花)로 장식하며, 소피대(素皮帶)에 오혁리(烏革履)을 신는다. 관인들은 다 비색(緋色)의 옷을 입고 은화(銀花)로 관(冠)을 장식한다. 서인(庶人)들은 비색(緋色)이나 자색(紫色) 계통의 옷을 입을 수 없다. ”라고 되어 있습니다. 『구당서』 백제악(百濟樂)에는 춤추는 무인의 복식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무(舞) 2인은 자대수군유(紫大袖裙襦)를 입고 장보관(章甫冠)을 쓰고 가죽신[皮履]을 신는다. ”라고 했습니다. 이상에서 백제 남자의 의복은 고구려와 같이 유고(襦袴) 차림이 기본이며, 각각의 명칭을 '복삼' 그리고 '곤'이라고도 불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에 왕과 귀족 등 고위계급은 소매가 넓은 포(袍)를 더 입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백제 여자의 의복은 '포와 같은 옷'이라 했으므로 상의는 아마도 고구려 여자처럼 장유를 착용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러나 소매가 약간 넓다고 했기 때문에 이 고구려 여자의 장유에 보이는 통수 형식보다는 소매가 더 넓었을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여자는 하의로서 군(치마)을 착용했습니다. 다음으로 회화와 유물 자료에 나타난 백제 의복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백제 남자의 기본 의복은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이 동자상에 나타난 바와 같이 유와 고 차림입니다. 동자상의 저고리는 착수형 소매에 엉덩이까지 닿는 길이이며, 바지는 통이 넓고(자막이 맞음) 발목 길이에 바지부리를 오므린 형태로서, 이것은 고구려 벽화에 나타난 남자들이 입고 있는 의복과 유사한 모습입니다. 또한, 백제 사신을 묘사한 그림을 통해서도 백제 남자의 관복을 추정해 볼 수 있는데요. 지금 보시는 바와 같이 「양직공도」와 「왕회도」의 백제 사신은 머리에 관을 쓰고, 또 소매가 길면서 폭도 약간 넓은 통수 소매에 무릎길이의 상의를 입고 있습니다. 이 상의에 대해서는 학자에 따라서 장유, 포(袍), 그리고 삼(衫), 복삼(複衫) 이러한 여러 가지 이름으로 지칭되고 있는데요. 이 수업에서는 일단 백제의 상의 이름인 '복삼'이라는 용어를 쓰도록 하겠습니다. 복삼의 허리에는 대를 매고 앞으로 길게 늘어뜨리고 있습니다. 하의는 바지부리를 오므리지 않은 대구고를 착용한 모습입니다. 복삼의 깃과 수구, 그리고 밑단과 대구고의 바지부리 이런 곳에는 선장식이 넓게 대어져있는 모습입니다. 「왕회도」에는요, 이 백제 사신 뿐만 아니라 고구려와 신라의 사신도 그려져 있는데요. 세 사신은 모두 유고 차림입니다. 이처럼 삼국에서 남자의 유와 고 차림은 일상복 뿐만 아니라 관복으로도 입혀졌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백제 여자의 기본 의복

다음으로 백제 여자의 기본 의복입니다. 백제 여자의 기본 의복은 소매가 약간 넓은 장유와 군(裙, 치마)입니다. 그런데 악공인과 같은 특수한 신분의 여성들은 조금 더 다양한 형태의 옷을 입었는데요. 지금 보시는 것처럼 백제금동대향로에 나타난 악기 연주자들의 모습에서 백제 여자의 의복을 짐작해 보실 수 있습니다. 왼쪽의 그림은 중국 수(隨)와 당(唐)의 여자 복식과 유사하게 좌우의 깃이 서로 겹쳐지지 않는 직령 합임형의 짧은 저고리를 입고 가슴 위치에서 치마를 둘러 입은 그러한 모습입니다. 그리고 저고리 위에는 수구 쪽으로 갈수록 소매가 더 넓어지는 대수포를 더 입고 있습니다. 오른쪽의 그림도 저고리와 치마, 그리고 대수포를 입은 모습인데요. 배소 연주자의 저고리와 치마 차림에 대해서는 두 가지 견해가 있습니다. 하나는 치마 위에 저고리를 입고 또 허리에 대를 묶었다라고 보는 견해이고, 다른 하나는 저고리 위에 치마를 입고 그 위에 웃치마를 더 둘렀다라고 보는 견해입니다. 어떤 견해이든 간에 하의로서 치마를 입은 모습은 확실한데요. 그런데 이 치마에는 고구려 여자의 치마에서 보이는 일정한 간격의 가늘고 섬세한 주름은 없는 것으로 확인되고 있습니다. 다음으로 백제의 머리모양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먼저 여자의 머리모양입니다. 『주서(周書)』 이역열전(異域列傳) 백제(百濟)에 따르면, “시집가지 않은 여자는 편발(編髮)로서 머리 위에 또아리를 틀고 뒤로 한 가닥을 늘어뜨리는 것으로 꾸밈을 삼았고, 시집간 여자는 이를 두가닥으로 늘어뜨렸다. " 라고 했습니다. 또 『북사(北史)』 열전(列傳) 백제(百濟)에서는 “처녀 때에는 머리를 땋아 뒤로 드리웠다가 시집가면 두갈래로 나누어서 머리 위로 틀어 올린다. ” 라고 하였습니다. 이상에서 백제의 미혼녀는 땋은 머리를 하고 기혼녀는 머리를 틀어 올린 얹은머리를 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백제 여자는 머리모양에 따라서 혼인 여부를 구별했다는 사실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백제의 금동대향로의 악기 연주자들은 다소 독특한 모양의 머리모양을 하고 있는데요. 한쪽으로 머리를 몰아서 위아래로 접고 가운데를 묶고 있는 그러한 형식입니다. 아마 일반적인 여자의 머리모양은 아니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남자의 머리는 「왕회도」의 백제 사신의 모습에서 추정해 볼 수 있습니다.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새 모양의 왕의 뒤꽂이 유물로 미루어 짐작컨데, 아마도 백제의 남자는 상투를 틀었다라고 추정됩니다.

백제의 관모와 장신구

백제의 관모는 조우관, 변형모, 그리고 금동관 등으로 구별됩니다. 『북사(北史)』 열전(列傳) 백제(百濟)에 따르면 “조배(朝拜)나 제사지낼 때에는 관(冠)의 양쪽곁(兩廂)에 깃을 꽂았으나, 군사(軍事) 때는 그렇지 않았다. ”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 기록에서 특별한 의례에서 조우관을 쓴 사실이 확인됩니다. 지금 보시는 유물은 부여 관북리에서 출토된 얼굴모양 토기편인데요. 백제의 변형모를 확인 하실 수 있습니다. '변(弁)'형, 즉 고깔형 모자 앞쪽에 세로선이 새겨진 그러한 형태입니다. 이 유물은 나주 신촌리에서 발견된 금동관인데요. 외관은 대륜식 입식관의 모양이고, 안쪽에는 금속제의 변형모가 내모로 함께 착용되었습니다. 이것은 은제 관모장식인데요, 양면을 대칭이 되게해서 인동당초문과 꽃봉우리 모양을 표현한 형태입니다. 금제관식과 은제관식 유물들은 앞서 공부했던 『구당서』 동이열전 백제의 기록 가운데 “왕은 오라관(烏羅冠)에 금화(金花)로 장식하고, 관인들은 은화(銀花)로 관(冠)을 장식한다”라는 기록 내용을 뒷받침하는 실증적 자료들이라고 생각됩니다. 백제의 귀걸이는 모두 세환식입니다. 그런데 도읍의 변천에 따라서 다양한 모습을 나타내고 있는데요. 지금 보시는 것이 한성시기의 귀걸이입니다. 서울, 경기, 충청 지역에서 주로 출토되고 있습니다. 귀걸이 형태는 세환에 노는고리를 걸고 중간 및 수하식을 금사로 연결한 것이 대부분이라고 합니다. 다음 것은 웅진시기의 귀걸이인데요, 공주 지역에서 주로 출토됩니다. 형태가 복잡하고 화려한 것이 특징인데요. 이 시기의 귀걸이는 신라, 가야, 그리고 왜의 귀걸이와 형태 및 제작기법이 유사해서 국제적인 성격을 보이고 있습니다. 다음은 사비시기의 귀걸이인데요, 부여지역에서 주로 출토됩니다. 중간식과 상하의 이음고리가 일체형으로 함께 주조된 특징이 있습니다. 백제 지역의 무덤에서는 금, 은, 옥과 유리 이런 다양한 구슬이 출토되었는데요. 시신의 목이나 가슴 부분에 여러 개가 모여서 출토된 경우에 이것은 목걸이로 사용됐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무령왕릉에서는 다양한 재료와 방법으로 만들어진 목걸이들이 나왔는데요. 지금 보시는 이 유물은 왕의 무덤에서 출토된 탄목으로 만든 금목걸이입니다. 다음 것은 왕비의 무덤에서 출토된 금구슬이 연결된 금목걸이입니다. 지금 보시는 목걸이도 왕비의 무덤에서 출토된 것인데요. 이 금제 9절 목걸이는 9개의 금막대들이 연결된 특이한 형태입니다. 다음 것은 부여에서 출토된 유리와 호박제 목걸이입니다. 아름다운 색과 모양의 조화를 느끼실 수 있습니다. 백제의 팔찌는 표면에 톱니모양을 새긴 팔찌와 그리고 금속막대를 둥글게 구부린 팔찌가 주로 출토되었습니다. 두 유물에서 보시는 것처럼 톱니모양 장식 팔찌는 백제뿐만 아니라 고구려, 신라, 가야에서도 나타나는데요. 이러한 형식은 삼국시대에 널리 사용했던 팔찌 모양으로 추측됩니다. 지금 보시는 팔찌는 여러 개의 막대를 연결한 독특한 형식의 팔찌인데요. 9절 목걸이와 유사한 형태로서 이는 백제 지역에서만 보이는 독특한 형태입니다. 이것은 표면에 용무늬가 새겨진 화려한 팔찌인데요. 예술적 가치가 높을 뿐만 아니라, 안쪽에 팔찌의 제작시기, 그리고 제작자, 제작 이유 이런 것들이 새겨져 있어서 사료적으로도 높은 가치를 지닌다고 합니다. 백제의 허리띠는 포백대(布帛帶), 혁대(革帶), 그리고 과대 등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서 유물로 남아 있는 것은 금속제 허리띠인 과대입니다. 지금 보시는 것이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금속제 허리띠인 과대인데요. 이 허리띠는 띠고리, 띠꾸미개, 그리고 띠끝장식, 띠드리개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띠고리가 둥근 버섯모양인데요, 띠꾸미개와의 연결부분은 심엽형 모양으로 뚫려있습니다. 띠꾸미개는 오목한 타원모양으로 큰 것과 작은 것이 번갈아 연결되어 있습니다. 띠드리개의 맨 위쪽과 아래쪽의 금장식에는 각각 두꺼비무늬와 도깨비무늬가 투조되어 있습니다. 이 허리띠는 6세기 신라나 일본의 허리띠와 유사한 형태로서 상호 관련성이 있다라고 보여지는 것입니다. 지금 보시는 유물은 부여에서 출토된 사비시기의 은제 띠꾸미개와 띠고리, 그리고 띠드리개인데요. 허리띠를 하는 방법이나 세부표현, 이런 것들에 있어서 공주의 무령왕릉 또는 신라의 허리띠와 차별성이 나타납니다. 공주 무령왕릉이나 신라의 허리띠에서는 띠고리에 끼워져있는 뾰족한 걸쇠에 허리끈을 끼워서 걸도록 만들어진 반면에, 이 유물은 걸쇠 부분이 없습니다. 따라서 띠고리에 허리띠 끈을 넣어서 한번 감고, 아래로 늘어뜨리는 방식으로 착용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신발

백제의 신발은 화(靴)와 리(履), 그리고 나막신 등이 있습니다. 가죽신발인 화(靴)는 신목이 있는 형태로서 「양직공도」와 「왕회도」의 두 그림에서 백제 사신이 신고 있는 신발의 형태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리(履)는 신목이 없는 형태인데요, 지금 보시는 유물처럼 금동식리에서 그 예를 볼 수 있습니다. 백제의 금동식리는 백제 왕릉 또는 토착지배세력의 무덤에서 주로 출토되었는데요. 왕과 지배세력의 위세품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이 금동식리는 무게나 크기가 보통 신발보다 크기 때문에 일상에서 신었다라기보다는, 국가의 행사나 의례용으로 착용되었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 유물은 부여 능산리 절터에서 발견된 나막신인데요. 2개의 굽을 따로 만들어서 붙인 것이 아니라 통판을 깎아서 만든 것입니다. 바닥판은 앞과 뒤를 모두 둥글게 해서 5개의 구멍이 나있는 그러한 형태입니다. 일상에서 착용한 것인지 아니면 의례용인지는 확실치 않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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