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복식의 종류와 형태를 이해하고, 고구려 복식의 특성과 문화적 기원에 대해 설명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번 시간에는 고구려의 의복에 대해 공부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고구려의 의복을 공부하기에 앞서, 고구려 복식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역사적 배경 지식을 간단히 알아보기로 하겠습니다.
고구려는 기원전 37년 부여에서 남쪽으로 내려온 주몽에 의해 건국되었습니다. 삼국 가운데 가장 먼저 국가 체제를 정비한 나라가 바로 고구려였는데요. 이 고구려는 4세기 전반에 낙랑군과 대방군을 정복하면서 한사군 세력을 한반도에서 완전히 몰아내었고, 4세기 후반에 율령 반포와 불교 공인을 통해 국가 발전의 새로운 토대를 마련했습니다. 4세기 말에서 5세기 초에 대규모 정복 사업을 단행하면서 만주에서부터 한반도 남부까지 영향력을 미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5세기 전반에는 평양으로 도성을 옮기게 됩니다. 고구려는 동북아시아의 패자로 군림하다가, 6세기 말에서 7세기 전반 무렵 수·당과의 연이은 전쟁으로 인해 국력을 크게 소모하게 됩니다. 여기에 내부 분열이 더해지면서 결국 668년 나·당 연합군에 의해 멸망하게 됩니다. 이처럼 고구려는 약 700년의 오랜 역사를 지닌 나라였는데요. 의생활과 복식문화 측면에서도 대단히 중요한 유산을 우리 후손들에게 남겼습니다. 고구려인들이 남긴 중요한 문화유산 가운데 하나가 바로 고분벽화입니다. 고구려 고분벽화는 한국 복식의 형태를 시각적으로 알 수 있는 최초의 자료임과 동시에, 고구려 복식의 형태를 이해할 수 있는 대표적 자료입니다. 고구려 복식을 알 수 있는 또 다른 복식 자료로는 앞서 부족 국가 시대와 마찬가지로 여러 종류의 중국 역사서들과 고구려 유적지에서 발굴된 유물들이 있습니다. 고구려 복식은 이러한 여러 가지 유형의 자료를 상호 비교하면서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상으로 자료 소개를 마치고, 지금부터 고구려 의복의 종류와 형태에 대해 공부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남자의 의복입니다. 고구려 남자는 유와 고를 입었습니다. 유는 저고리에 대응되는 한자 명칭인데요, 비교적 길이가 짧은 상의를 말합니다. 고는 바지를 지칭하는 말입니다. 고구려 남자의 저고리는 그림에서 보시는 것처럼 엉덩이 부근까지 내려오는 정도의 길이이면서, 직령(直領), 즉 곧은 깃이 달려 있는 형태입니다. 앞 중심이 완전히 트여 있으면서 좌우 몸판을 서로 겹쳐서 여며 입고 허리에는 허리띠를 묶어서 여밈이 벌어지지 않도록 고정하였습니다. 저고리는 몸판을 여미는 방식에 따라서 좌임과 우임의 형식이 있었는데요. 좌임은 착용자의 오른쪽 몸판이 왼쪽 몸판 위로 올라오는 형식이고, 우임은 반대로 왼쪽 몸판이 오른쪽 몸판 위로 올라오는 형식입니다. 고대로부터 중국의 한족과 북방 기마민족은 여밈의 형식이 서로 달랐는데요. 한족은 우임이 많았던 반면, 북방 기마민족은 좌임이 많았습니다. 고구려의 저고리에는 좌임과 우임이 공존했던 것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림에서 보시는 것처럼 저고리에는 몸판과 다른 색의 선 장식이 있습니다. 이 선은 깃과 앞 중심의 여밈 부분, 밑단, 그리고 소매 부리에 대었는데요. 의복에 선을 달았던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의복에 선을 달면 그 부위에 때가 덜 타게 되고, 장식 효과도 생기게 됩니다. 그리고 의복의 트인 부분을 통해서 사악한 기운이 들어오는 것을 막고자 하는 그런 주술적 의도나, 또 선의 색채와 개수로 신분을 나타내고자 하는 의도 등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저고리를 묶는 허리띠를 대(帶)라고 하는데요. 재료에 따라 직물로 만든 포백대(布帛帶), 가죽으로 만든 혁대(革帶) 등이 있습니다. 지금 보시는 무용총 벽화의 두 무용수는 검은색 직물로 만든 포백대를 맨 것으로 추정되는데요. 허리띠 끝을 나비 모양으로 묶어 허리 아래로 드리운 모습이 보입니다. 이 그림에서 남자는 백색 가죽으로 만든 혁대를 맨 것으로 추정되는데요. 『주서』, 『수서』와 같은 문헌에서 고구려 남자의 '백 위대(白韋帶)', '소피대(素皮帶)'라는 기록이 있어서 백색 가죽띠의 존재가 확인되고 있습니다. 가죽으로 만든 혁대에는 금속으로 만든 과판, 즉 띠 꾸미개를 붙여서 장식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허리띠를 과대라고 합니다. 과판의 아래쪽으로는 요패(腰佩), 즉 띠드리개를 연결해서 꾸미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안악 3호분의 두 의장 기수의 허리띠를 자세히 살펴보시면 하트 모양, 즉 심엽형의 고리가 달린 것이 보입니다. 이 벽화에서 보이는 것과 유사한 모양, 즉 심엽형 고리가 달린 금동제 띠 꾸미개가 출토되기도 했는데요. 이로써 고구려 과대의 실재를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허리띠에 어떤 기물이나 도구를 다는 풍습은 유목민족의 이동 문화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합니다. 실용적 목적이 후대에 장식적으로 변모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허리띠 장식에 대해서는 이후 고구려의 장신구 수업에서 좀 더 자세히 공부할 예정입니다. 고구려 남자의 하의는 고, 즉 바지였습니다. 무용총의 남자 무용수에서 보시는 바와 같이 바지는 발목까지 오는 길이에, 바지 부리를 오므린 형태였습니다. 바지의 두 가랑이 사이에는 '당'이라고 하는 별도의 삼각형 천을 대어서 바지 밑을 막았는데요. 이렇게 당이 달려서 밑이 막힌 구조의 바지를 '궁고(窮袴)'라고 했습니다. 이 궁고는 측면에서 보면 삼각형으로 붙어 있는 당 때문에 엉덩이 부분이 뾰족하게 보입니다. 이 그림에서 바지의 엉덩이 부분이 뾰족하게 표현된 것은 바로 이러한 고구려 바지의 구성적 특징 때문인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지금 보시는 두 벌의 바지는 1세기 무렵의 흉노족 무덤에서 출토된 바지입니다. 왼쪽 것은 견직물 바지이고, 오른쪽 것은 모직물 바지입니다. 모두 바지 부리 부분이 오므려져 있고, 두 가랑이 사이에 당이 달려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고구려의 바지도 이러한 흉노족의 바지와 유사한 형태였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고구려의 바지는 귀족의 것이 서민에 비해 통이 넓었는데요. 지금 보시는 무용총 벽화의 친견도에서 왼쪽 사람에 비해 오른쪽 사람이 크게 그려져 있는데요. 이것은 이제 신분 차이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오른쪽 사람은 무덤의 주인인데요. 무덤 주인의 바지를 보시면, 바지통이 더 넓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통이 넓은 바지는 바지 부리를 오므린 형식과 바지 부리를 오므리지 않은 형식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고구려 고분벽화에서는 바지 부리를 오므린 형식이 대부분입니다. 그러나 7세기 당 초기에 그려진 「왕회도」에서 고구려 사신의 모습을 보시면 바지 부리를 오므리지 않은 형식의 통이 넓은 바지를 볼 수 있는데요. 이러한 형태의 바지를 '대구고(大口袴)'라고 합니다. 고구려 남자의 저고리와 바지에는 마름모형, 원형 등 단순한 기하학적 문양이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러한 기하학적 문양은 신분 고하에 상관없이 나타나는데요. 다만, 귀족의 경우에는 두 종류 이상이 혼합되어 나타나는 경향이 있습니다. 두 그림에서 저고리와 바지에 사용된 기하학적 문양들을 잘 보실 수 있습니다. 이상에서 고구려 남자의 유고 차림을 다시 한번 정리해 보면, 저고리는 엉덩이 길이까지 내려오고 허리띠를 매서 여미는 형태입니다. 그리고 바지는 두 다리를 각각 따로 감싸주는 형태에 밑 부분에 당이 있어서 밑이 막힌 형식입니다. 이러한 의복의 구조는 활동과 보온에 아주 유리한데요. 그래서 고구려 남자의 기본 의복은 활동성과 보온성을 중시한 북방식 의복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고구려 남자의 의복으로서 유와 고 이외에, 또 다른 종류인 포(袍)가 있습니다. 이 포는 상의와 하의가 분리되지 않고 하나의 옷으로 연결되어 있는 의복입니다. 고구려의 포는 옷의 품과 소매통이 넓고, 옷 길이가 발등을 덮으면서 땅에 끌릴 정도로 긴 형태입니다. 이 포의 허리 부분에는 폐슬(蔽膝)을 차기도 했는데요. 이 오른쪽 그림에서 적색의 폐슬을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폐슬은 의례복의 부속품 가운데 하나인데요, 허리 아래로 늘어뜨린 직사각형의 긴 천을 말합니다. 일반적으로 고구려의 포는 중국 계통의 의복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고구려에서 포는 유와 고처럼 보편적으로 전 시기에 걸쳐 입혔던 옷은 아니었는데요. 고구려 고분벽화를 통해서 볼 때, 이 고구려의 포는 평양 주변 지역에서 많이 입었고, 시기적으로는 5세기 후반 이전까지 주로 입혀졌던 것으로 확인되고 있습니다.
다음으로 고구려 여자의 의복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고구려 여자 역시, 남자와 마찬가지로 유와 고, 즉 저고리와 바지를 입었습니다. 그런데 여자가 저고리와 바지만 입는 경우는 주로 서민층에 국한된 경향이었고, 대부분의 여자들은 이 바지 위에 치마를 덧입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고구려 여자의 저고리는 길이에 따라 두 종류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왼쪽 그림에서 저고리는 엉덩이 부분 정도까지 내려오는 길이이고, 오른쪽 그림에서 저고리는 무릎 부분까지 내려오는 좀 더 긴 길이의 저고리입니다. 이 후자의 긴 저고리를 한자로 '장유'라고 합니다. 이러한 형태의 장유를 과거에는 길이가 긴 겉옷인 '포'라고 명명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최근에는 '포'보다는 '장유'로 지칭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본 수업에서도 장유로 지칭하도록 하겠습니다. 이 여자 저고리의 구조는 기본적으로 남자와 거의 동일합니다. 대부분 직령 깃에 앞 중심이 트여 있고, 허리에 띠를 묶어서 고정했습니다. 이 허리띠는 그림에서 보시는 것처럼 허리 뒤쪽에서 묶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남자 저고리와 마찬가지로 여자의 저고리에도 깃과 여밈, 그리고 밑단과 소매 부리에 몸판과 다른 색의 선을 대었습니다. 또 여자의 저고리에도 원형이나 사각형의 기하학적 문양이 사용된 경우가 많았습니다. 다음으로는 고구려 여자의 치마에 대해 공부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일반적으로 고대의 치마는 한자로 군(裙) 또는 상(裳)이라고 하는데요. 『주서』, 『수서』, 『북사』와 같은 문헌에서 고구려 여자의 치마는 모두 '군(裙)'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치마는 저고리, 바지와 함께 고구려 여자의 기본 의복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이 두 그림에서 보시는 것처럼 고구려 여자의 치마는 저고리 아래에 착용한 것인데요. 가슴 선에서 여며 입는 지금의 한복 치마와는 달리 인체의 허리 부분에서 치마를 여며 입은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고구려 여자의 치마는 발등을 덮는 정도의 길이가 일반적이었습니다. 그러나 때로는 오른쪽 무용총 여인들의 치마처럼 발목보다 조금 더 올라가는 정도의 길이도 있어서 치마 밑에 입은 바지가 살짝 드러나 보이기도 했습니다. 고구려 여자의 치마는 허리선부터 밑단까지 일정한 간격의 가늘고 섬세한 주름이 잡혀 있는 주름치마 형식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치마의 밑단에는 치마 색과 다른 색의 선을 대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또 고구려 치마 가운데에는 색동 치마가 있었는데요. 이 그림에서 보시는 것처럼 색동 치마는 서로 다른 색의 옷감을 일정한 규칙에 따라서 반복적으로 연결한 형식의 치마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색동 치마는 고구려 여인들 뿐 만 아니라, 중국 위진시대의 벽화나, 당 초기의 회화, 그리고 일본 아스카 시대의 고분벽화 등에서도 나타나고 있어서, 5~7세기 무렵 동아시아 지역에 유행했던 치마 양식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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