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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의 복식, 관복 등 복장 사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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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의 복식, 관복 등 복장 사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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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의 복식, 관복 등 복장 사료

발해는 고구려 멸망 후 약 30년 뒤인 698년, 대조영이 당과 신라 연합군에 대항하면서 고구려를 계승하여 건국한 나라입니다. 8세기 초 무왕 대에는 영토를 확장하여 북만주 일대를 차지했습니다. 8세기 중후반 문왕 대에는 요하까지 영토를 확장하였으며, 스스로 황제국 가임을 자처하고 당과 일본에 여러 차례 사신을 보냈습니다. 9세기 전반 선왕 대에는 고구려보다 더 넓은 영토를 차지했으며 중국으로부터 해동성국이라 불리기도 했습니다. 산동성 등주에는 발해 사신을 접대하는 발해관이 설치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9세기 말부터 차츰 국력이 약해지다가 요의 침략을 받고 926년에 멸망하게 됩니다. 발해는 강한 군사력과 발전된 문화를 향유하면서 남쪽의 신라와 공존하여 남북국(南北國)의 형세를 이루었습니다. 발해의 문화에는 전대의 고구려적인 요소와 토착 말갈의 요소, 그리고 발해 당시 중국의 요소와 발해 고유의 독창적 요소 등이 혼재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다문화적 특징이 복식에도 반영되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발해 복식에 대한 자료는 수와 종류가 대단히 적은 편입니다. 문헌 자료로 중국 역사서인 『신당서(新唐書)』를 들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발해 복식을 확인할 수 있는 대표적인 회화 자료로는 길림성 정효공주 묘 벽화가 있습니다. 그 외에 유물 자료로서 삼채용, 청동용 등이 있고, 장신구인 과대, 뒤꽂이 등이 남아 있습니다. 그런데 유물 자료는 대부분 중국 연변박물관과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박물관 등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자 그럼, 지금부터 발해 복식에 대해 공부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발해의 관복

먼저, 『신당서』에 기록된 발해의 관복을 살펴보겠습니다. 『신당서(新唐書)』 북적열전(北狄列傳) 발해(渤海)에 따르면, “품계(品階)는 질(秩)로 쓰는데, 3질 이상은 자복(紫服)에 아홀(牙笏)과 금어(金魚)를 찬다. 5질 이상은 비복(緋服)에, 아홀과 은어(銀魚)를 찬다. 6질과 7질은 천비의(淺緋依)를 입고, 8질은 녹의(綠衣)를 입는데, 모두 목홀(木笏)이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는 발해의 관복에 관한 기록으로서 관복의 색과 홀의 재료, 그리고 어대의 재료 등으로 관 품을 구분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발해에는 '전 중시'라는 기관이 있었는데요, 이 전 중시는 황제의 복식 등을 담당했던 당의 '전중성'과 유사한 기관으로 파악됩니다. 관복 기록과 전 중시의 존재로 보아 발해는 체계적인 복식제도를 갖추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다음으로 회화와 유물을 통해 남자 복식을 알아보겠습니다. 먼저 길림성 화룡현의 정효공주묘의 벽화에 나타난 인물들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정효공주는 제3대 문왕의 넷째 딸로 이 무덤의 벽화에는 무사 2명, 시위 2명, 악사 3명, 내시 3명, 시종 2명 등 총 12명의 인물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대표적 인물들의 복식을 분석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지금 보시는 이 그림은 시종의 모습입니다. 시종은 머리에 복두를 쓰고 있고, 옷은 백색 계열의 단령을 착용하고 있습니다. 단령 안에는 중단과 내의를 착용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리고 허리에는 대를 매고 있습니다. 단령에는 옆트임이 있는데요, 이 옆트임 사이로 바지인 고를 확인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등에는 활을 매고 있는 모습입니다. 이 그림은 무사입니다. 무사는 투구를 쓰고 있고, 황색 계열의 견갑(肩甲)이 달린 포 형태의 찰갑(札甲)을 입은 것으로 추정됩니다. 허리에는 대를 둘렀으며, 신목이 올라오는 화를 신은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손에는 철퇴를 들었습니다. 시위는 머리에 홍색 말액을 두르고 있고, 단령을 착용했습니다. 단령 안에는 중단과 내의를 입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허리에는 대를 둘렀으며 고를 입고 화를 신은 모습입니다. 그리고 손에는 철퇴를 들고 있고, 허리 아래쪽으로는 활과 화살을 매고 있는 모습입니다. 이러한 옷차림은 당시 당 무관의 일상적인 복식과 유사한 모습이라고 합니다. 말액(抹額)은 부대를 구분하기 위한 것이며, 특히 홍색 말액은 군인이 일반인과 구별됨을 표시하기 위해 일상적으로 썼던 것이라고 합니다. 이상에서 살펴본 시종, 무사, 시위는 모두 각종 무기를 소지한 모습으로서 무인에 속하는 인물들임을 알 수 있습니다. 정효공주 묘 벽화의 인물들을 조금 더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지금 보시는 두 그림은 내시와 악사입니다. 모두 복두를 쓰고 있고 단령을 입고 있는데요, 내시는 녹색 계열, 악사는 홍색 계열의 단령입니다. 단령 안에는 모두 중단과 내의를 착용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허리에는 대를 매고 있고, 단령의 옆트임 사이로 고를 확인 할 수 있습니다. 내시는 보자기로 싼 물건을 받들고 있고, 악사는 악기로 보이는 물건을 받들고 있는 모습입니다. 이들은 모두 공주의 궁중생활을 보필하는 궁인에 속하는 인물들로 추정됩니다.

발해 남자의 허리띠와 어부 유물

다음으로 발해 남자의 허리띠와 어부 유물들을 살펴보겠습니다. 지금 보시는 것은 길림성 화룡현에서 출토된 금동과대입니다. 띠고리가 둥근 버섯모양이며, 수정과 녹송석을 박아 화려하게 장식한 모습입니다. 이와 같은 과대가 발해 관복의 허리띠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지금 보시는 것은 러시아 연해주에서 발견된 청동 부절(符節)인데요, 물고기 모양으로 생겨서 '어부(魚符)'라고도 합니다. 이 어부는 관리들이 허리띠에 패용한 신분 표시용 부절인데요, 관성명(官姓名)을 새긴 후에 좌우 2개로 나누어 왼쪽 어부는 궁에 바치고 오른쪽 어부는 지니고 있다가 궁에 출입할 때 합쳐서 보도록 했습니다. 이 유물은 좌우 두 개를 합하면 옆면에 '합동'이라는 글자가 완성되고, 뒷면에는 발해 장군의 관직명과 이름이 새겨져 있다고 합니다. 이러한 어부를 담는 주머니를 '어대'라 했습니다.

발해의 여자 복식

다음으로 발해의 여자 복식에 대하여 공부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발해의 여자 복식은 명칭에 관한 문헌 자료가 없기 때문에 주변국인 통일신라와 당의 복식 용어를 사용하여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지금 보시는 두 유물은 중국 길림성 화룡현에서 출토된 발해의 삼채 여용입니다. 두 여인은 옷차림이 유사하지만, 머리 모양은 좀 다른 모습인데요. 왼쪽 여인은 정수리에 작은 상투를 만들어 앞으로 살짝 드리우고 옆머리를 자연스럽게 아래로 모은 머리형이고, 오른쪽 여인은 머리 양 쪽에 고리를 만들고 가운데를 묶은 쌍계형입니다. 두 여인은 모두 짧은 저고리인 단의를 입고 있고, 그 위로 치마인 군(裙)을 가슴 부근에 착용한 모습입니다. 치마 말기 위로는 대를 매고 있으며 신발로 이를 신은 모습입니다. 지금 보시는 것은 러시아 연해주에서 발견된 발해 청동용의 앞모습과 뒷모습입니다. 머리는 상하좌우 네 갈래로 나누어, 정수리 양쪽에서 두 개의 작은 고리를 만들어서 묶고, 양쪽 귀의 아래에서 다시 두 개를 묶어 약간 드리운 모양입니다. 상의로는 포의 일종인 표의를 착용하였고, 표의 안에는 내의를 입은 것으로 추정됩니다. 내의 위로 장군(長君)을 착용했는데요. 군 위로 허리대를 매고 길게 늘어뜨렸습니다. 그리고 어깨에는 운견을 입은 모습입니다. 운견은 고대 북방 민족의 어깨 장식이라고 합니다. 마지막으로 발해의 장신구를 살펴보겠습니다. 발해의 장신구로는 귀고리, 목걸이, 팔찌, 반지 등이 있습니다. 지금 보시는 것은 발해의 금제 태환식 귀걸이인데요, 조롱박과 같은 작은 장식이 달려 있습니다. 이것은 흑룡강성에서 출토된 발해의 목걸입니다. 서로 다른 크기의 환옥들이 연결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발해의 여자들은 주변국과 마찬가지로 비녀와 빗 등으로 머리를 장식했는데요, 지금 보시는 유물은 윗부분을 꽃 모양으로 장식한 뒤꽂이입니다. 꽃 모양 3개가 산(山) 자 형태로 만들어져 있는데요, 상부의 이러한 모양은 발해의 특유한 양식으로 이해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발해의 복식에 대해 공부해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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