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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전, 중기 여자예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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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전, 중기 여자예복

고려 전, 중기 여자예복
고려 전, 중기 여자예복

고려시대 여자 복식을 예복과 평상복으로 나누어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특히 예복 부분은 시기를 나누어서 공부할 예정인데요, 고려 전·중기, 원 간섭기, 고려 말기 이렇게 세 시기로 나누어서 학습할 예정입니다. 이번 수업을 통해서 여러분들은 고려시대 왕비와 귀부인의 예복 제도의 변천 과정을 알아보겠습니다.

고려 전기, 중기의 여자 예복

먼저, 이번 시간에는 고려 전, 중기의 여자 예복에 대해 공부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고려 전·중기의 여자 예복은 신라의 옛 제도 또는 당·송의 복식 제도와 유사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삼국사기』 색복(色服)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우리 태조(太祖: 왕건)가 명(命)을 받은 후에 모든 국가 법도는 신라의 옛 것을 따른 것이 많았으므로, 즉 지금의 조정과 남녀의 의상도 이 역시 대개 춘추(春秋)가 청해서 들여와 남아있는 제도일 것이다. 신(臣: 김부식)은 상국(上國) 사신으로 세 번 봉행했는데, 일행의 의관(衣冠)이 송나라 사람과 더불어 차이가 없었다. (중략) 또 송(宋) 사신(使臣) 유규(劉逵), 오식(吳拭)이 내빙하여 숙소에 묵고 있을 때 연회에서 향장(鄕粧)한 기생(倡女)을 보고서 계단 위로 불러와서 활수의(闊䄂衣), 색사대(色絲帶), 대군(大裙)을 가리키며 찬탄하여 말하였다. “이것들은 모두 삼대(三代: 夏·殷·周) 의 옷인데, 여전히 쓰이고 있을 줄은 몰랐다. ” 이러한 것들로 볼 때 지금 부녀의 예복(禮服)도 대개 당(唐)의 옛 것임을 알 수 있다. ”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기록에서 세 부분의 내용이 주목되는데요, 첫 번째는 고려 초기 모든 국가의 법도가 신라의 옛 것을 따른 것이 많았다고 한 부분입니다. 남녀의 의상과 관련된 법도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두 번째는 연회에서 기생이 활수의, 색사대, 대군을 입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12세기 초 고려에 온 송의 사신들은 이러한 옷들을 고대의 중국풍으로 이해했습니다. 활수의는 소매가 매우 큰 옷이고,또 색사대는 허리띠의 일종입니다. 대군은 폭이 넓은 치마입니다. 세 번째로 주목되는 부분은 지금 부녀의 예복도 대개 당의 옛 것이라고 한 내용입니다, 『삼국사기』가 고려 인종 23년(1145)에 완성되었으므로, 여기서 '지금'이라고 한 시기는 12세기 전반, 즉 고려 중기에 해당하는 시기입니다. 고려 중기의 여자 예복을 추정할 수 있는 또 다른 단서를 『고려도경』에서도 찾을 수 있는데요. 『고려도경』 부인편 서문의 후반부를 같이 한번 읽어 보시겠습니다. “근년에 고려 사신[貢使]이 중국 궁궐에 와서 송[朝廷]의 하사품인 10등 관복(冠服)을 얻은 것을 계기로 중국 제도를 좇았다. 현재 왕족[王府]과 재상가[國相家]에서는 중국풍이 상당히 있는데 또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중국풍과 같아질 것이다. 이제 중국과 다른 점을 우선 간추려 그린다.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기록에서 고려의 여자 의복이 중국과 다른 점도 분명 있었지만, '현재 왕족과 재상가에서는 중국풍이 상당히 있다'라는 내용이 주목됩니다. 『고려도경』의 저자인 서긍이 고려에 사신으로 온 해가 인종 원년(1123)이었기 때문에 이 기록에서 '현재'는 12세기 초반에 해당합니다. 즉, 고려 중기까지 왕족과 재상가의 여자 복식 가운데에는 중국풍이 상당히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기록에서 말하는 중국풍의 복식이라는 것이 평상복인지 아니면 예복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문맥의 흐름으로 볼 때 예복일 가능성이 큰데요, 선행하는 문구에서 남자 관복이 중국 제도를 따르고 있음을 언급하고 있기 때문에 후술하고 있는 왕족과 재상가의 중국풍은 이에 대응하는 여자 예복일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됩니다. 이상의 두 문헌 기록을 근거로 종합해 볼 때, 고려 전·중기 여자의 예복 제도는 신라의 옛 제도, 또는 당·송의 복식 제도와 유사했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런데 여러분, 통일신라시대의 여자 복식 또한 당의 영향을 받은 것이 많았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당의 여자 예복 제도를 이해하면, 고려 전·중기 여자의 예복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당나라 여자 예복

『신당서』 거복지(車服志)에는, 당나라 여자의 예복으로서 황후복, 황태자비복, 명부복(命婦服)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명부복, 명부는 봉작을 받은 부인들을 말합니다. 황후복은 휘의(褘衣), 국의(鞠衣), 전채단의(鈿釵襢衣) 3종류가 있었습니다. 황태자비복은 유적(褕翟), 국의, 전채단의 3종류가, 그리고 명부복은 적의(翟衣), 전채례의(鈿釵禮衣), 예의(禮衣), 공복(公服), 화채례의(花釵禮衣), 대수연상(大袖連裳) 이렇게 6종류가 있었습니다. 매우 다양한 종류의 여자 예복이 있었음을 알 수 있는데요, 이러한 예복들을 다양한 상황에 맞게 입었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많은 종류의 예복 가운데 어떤 옷이 얼마나 고려 여자의 예복과 유사했는지에 대해서는 현재로서는 정확히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그러나 『고려사』에서 고려 전기의 여자 예복에 관한 중요한 단서를 하나 발견할 수 있는데요. 바로 다음의 기록입니다. 『고려사』 열전 문종후비 인예순덕태후 이씨의 왕비책봉책문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습니다. “그 큰 아름다움을 돌아보면 정식으로 책봉함을 마땅히 보여야 하리니, 드디어 높은 이름[鶠銜]을 내리도록 명하여 '적복(翟服)'을 입는 영광을 더하려고 한다. 이제 아무 관직에 있는 아무개를 보내 부절(符節)을 잡고 예를 갖추어 왕비로 책봉하도록 명한다. ”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기록에서 11세기 중반에 고려 사람들이 왕비의 최고 예복인 '적복(翟服)'의 존재를 인식하고 있었던 사실이 확인됩니다. '적복'은 왕비 책봉시의 예복으로서 적(翟) 무늬, 즉 꿩 무늬가 장식되어 있는 예복을 지칭하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앞서 살펴본 당 여자의 예복 가운데, 책봉 시 예복이면서 꿩 무늬가 장식되어 있는 것은 황후의 휘의, 황태자비의 유적, 명부의 적의 이렇게 세 종류입니다. 이처럼 꿩 무늬가 장식된 옷은 고대로부터 후비와 명부의 최고 예복으로서, 그 제도가 송과 남송시기까지 계속 이어졌는데요, 따라서, 송에서도 황후는 휘의, 황태자비는 유적, 명부는 적의를 입었습니다. 지금 보시는 그림은 송 인종(1022~1063 재위)의 황후인 자성광헌황후(慈聖光獻皇后) 조씨(曺氏)의 초상화인데요, 좌우에 시녀를 거느리고 있는 모습의 좌상입니다. 이 초상화에서 11세기 송 황후의 예복인 휘의를 확인 할 수 있습니다. 청색 바탕의 옷 전체에 한 쌍의 꿩 무늬가 규칙적으로 배열되어 있고, 꿩 사이에는 둥근 꽃무늬가 들어가서 꿩 무늬와 서로 조화를 이루고 있습니다. 깃과 소매의 가장자리와 옷의 아랫단인 도련 부분에는 홍색의 선을 대었는데요, 여기에도 또 용과 구름무늬를 화려하게 장식했습니다. 그리고 허리에 홍색의 대대를 둘렀습니다. 머리에는 진주를 포함해서 많은 장식이 달린 용봉화채관(龍鳳花釵冠)을 쓰고 있습니다. 이 초상화는 11세기 고려 왕비의 적복을 추정하는데 참고가 되는 그림 가운데 하나라 할 수 있겠습니다. 한편, 고려 전·중기 왕비의 복식으로서 또 다른 종류의 옷이 하나 더 있는데요, 바로 '그림 또는 자수가 장식된 홍색 옷'입니다. 『고려도경』 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습니다. “어떤 이들이 말하기를, 왕비(王妃)나 부인(夫人)들은 홍색[紅]을 소중하게 여기면서 그림을 그리거나 수(繡)까지도 놓지만 관료[國官]와 서민(庶民)은 감히 그렇게 할 수 없다고 한다. ”라는 내용입니다. 이 기록에서 왕비가 입을 수 있었던 옷으로서 '그림 또는 자수가 장식된 홍색 옷'이 주목되는데요, 비록 우리가 이 홍색 옷이 어떤 품목이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원 간섭기 때, 고려 불화에서 왕비가 홍색의 반수포(半袖袍)를 입고 있는 모습으로 미루어 볼 때, 고려 전·중기에도 왕비가 홍색의 포를 겉옷으로 입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까지 고려 전·중기의 여자 예복에 대해 함께 공부해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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