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 남자의 평상복에 대해 공부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고려시대 남자의 의복을 살펴보겠습니다. 고려시대의 남자 평상복 의복 가운데 대표적인 것은 백 저포, 즉 백색의 모시로 만든 포입니다. 『고려도경』에 의하면 "왕은 평상시 쉴 때 검은색 건에 백 저포를 입으므로 백성과 다를 바 없다"라고 했습니다. 또한 『고려도경』에는 저의(紵衣)에 대한 기록도 있는데요, “저의는 속에 입는 홑옷[中單]인데, 고려의 풍속[夷俗]은 가선이나 깃[純領]을 사용하지 않으며, 왕에서부터 민서에 이르기까지 남녀 모두 이를 입었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가선이나 깃이 붙지 않은 모시 속옷을 남녀노소 귀천 없이 착용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고려시대의 회화와 불복장 유물에서는 더욱 다양한 남자의 포를 볼 수 있는데요, 직령포, 요선철릭, 답호, 심의 등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지금 보시는 초상화에서 원 간섭기 직령포의 모습을 볼 수 있는데요, 깃은 이중 깃의 형식이며 여밈이 우임으로 겨드랑이 아래까지 깊게 겹쳐진 모습입니다. 직령포의 옆선이 트여있으면서, 허리에는 홍색의 대를 착용하였습니다. 신은 검은색 화를 신은 모습입니다. 고려시대 남자 평상복 가운데 14세기의 요선철릭과 답호 등은 실물 자료가 남아 있어서 그 형태를 구체적으로 살펴볼 수 있습니다. 이 유물들은 원 간섭기 또는 고려 말기의 복식 고증을 위해 매우 귀중한 자료입니다. 7백 년 이상 천연 섬유로 만들어진 옷이 보존될 수 있었다 라는 것은 불복장 의식 때문인데요, 사찰에서 불상을 조성할 때 행해진 불복장 의식을 통해 옷이나 직물들이 불상의 뱃속에 들어가 밀봉되어 남아 있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대표적인 유물로는 충목왕 2년(1346)에 조성된 문수사 금동여래좌상 불복장 유물과 1350년 무렵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해인사 비로자나불 복장유물, 온양 민속박물관에 소장된 아미타불 복장유물 이러한 것들이 있습니다. 지금 보시는 옷은 해인사 비로자나불 복장에서 나온 14세기의 요선철릭입니다. 이 요선철릭은 전체적인 크기로 보아 소년의 것으로 추정되는데요, 연분홍빛의 고운 모시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이중 깃이며 소매가 좁고 긴 편입니다. 이 요선철릭의 특징은 허리 부분에 여러 개의 선이 장식되어 있는 점입니다. 앞에는 9개, 그리고 뒤에는 10개의 장식 주름이 있는데요, 허리 부분의 바탕천을 주름잡아 말아 접어서 곱게 박음질한 것입니다. 요선 아래의 치마 부분에는 전체적으로 맞주름을 곱게 잡았는데요, 안자락에는 주름이 생략되어 있습니다. 이 요선을 만드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었습니다. 몸판에 직접 주름을 잡아서 만드는 방식, 또는 가늘게 짠 끈을 부착하는 방식, 또는 비단 천을 말아 만든 선을 부착하는 방식 등이 있었습니다. 이 요선철릭은 조선 전기에도 착용되었는데요, 지금 보시는 변수(1447-1524) 묘에서 출토된 조선 전기의 요선철릭에서는 요선의 개수가 20개 이상으로 고려시대의 것 보다 훨씬 더 많이 장식된 것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한편 요선철릭 말고도 철릭이라는 옷도 있는데요. 이 '철릭'이라는 옷은 고려가사인 <정석가(鄭石歌)>에도 등장합니다. 철릭은 상의(上衣)와 하상(下裳)이 따로 재단되어 허리선에서 봉제된 옷인데요, 하상에 주름이 잡혀있는 것이 특징입니다. <정석가>에서는 전쟁에 출전하는 남편을 위해 무쇠를 마름질하여 철릭을 만든다는 가사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전쟁이 잦았던 시기에 남편이 전쟁터에서 입을 철릭을 무기가 통과하지 못하도록 무쇠로 만들고 싶다는 그런 아내의 마음이 표현되어 있습니다.
다음은 답호입니다. 답호는 반소매 옷입니다. 소매가 절반이라고 해서 '반수포' 또는 '반수의'라고도 불립니다. 조선시대 융복에 관련된 기록을 보면 철릭과 답호가 한 벌로 나타나기 때문에 이 답호는 주로 철릭 위에 덧입기 위해 만들어진 옷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해인사와 문수사에는 고려시대의 답호 유물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지금 보시는 것이 문수사 답호인데요, 이중 깃이 달려있고, 양 옆이 트여있으며, 사다리꼴의 무를 달고 무의 윗부분에 맞주름을 잡아서 옆트임 안쪽으로 정리한 형태입니다. 이전 시기 통일신라시대에도 '반비(半臂)'라고 하는 반소매 옷이 존재했는데요, 따라서 이 답호는 기존의 반소매 옷 전통과 몽골의 풍습이 결합하여 형성된 의복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고려 말기 몽골어 교습서로 사용된 <노걸대> 언해본에서 답호는 답호(踏胡, 褡護), 탑홀(搭忽) 등 여러 가지로 표기되었는데요, 이를 '더그레'라고 부르기도 했다고 합니다. 다음은 고려시대 남자의 포 가운데 심의(深衣)를 살펴보겠습니다. 지금 보시는 이 그림은 이제현(1287~1367)의 초상화인데요, 검은색 건[皁巾]에 심의를 착용한 모습입니다. 심의(深衣)는 상의(上衣)와 하상(下裳)이 분리되어 제작된 후 허리에서 연결된 옷으로서 백색 바탕에 깃과 수구, 그리고 도련에 검은색 선을 두른 포입니다. 심의는 주자학의 전래와 함께 고려에 수용된 옷인데요, 따라서 유학자의 옷으로 여겨졌습니다.
다음은 남자의 바지입니다. 고려시대 남자의 바지는 그림에서 보시는 것처럼 고려불화의 일부분에 묘사된 민중들의 모습에서 그 형태를 찾아 볼 수 있습니다. 고려시대의 바지에는 통이 좁으면서 당이 달린 형태의 바지인 '궁고(窮袴)'도 있었고, 또 물질을 하기에 편리한 짧은 바지인 '단갈(短褐)'이라는 것도 있었습니다. 다음으로 고려시대 남자의 머리 모양과 머리 장식, 그리고 쓰개에 대해 공부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고려도경』에 의하면, 고려 남자는 혼인 후에 상투를 틀며 [束髮], 혼인하지 않은 남자는 건으로 머리를 싸고 나머지는 뒤로 늘어뜨렸다 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또한 관모를 쓰지 않고 알 상투를 내보이는 머리를 죄수와 다름없는 것으로 여겨 부끄럽게 여긴다고 쓰여 있습니다. 이로 미루어 보건데, 고려 사람들에게 머리 모양과 쓰개는 상당히 중요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지금 보시는 것은 남자의 상투를 고정시키던 U자형 동곳들인데요, 특히 고려는 불교를 국교로 한 나라였던 만큼 부처님 머리 모양처럼 생긴 동곳인 불두잠이라는 것도 발견이 됩니다. 『고려도경』 제22권 잡 속편에서는 고려 남자의 건(巾)과 책(幘)이 당나라 제도를 약간 본받고 있다고 쓰여 있습니다. 무늬가 있는 라(羅)라는 소재로 만든 건인 문라건(文羅巾)이 자주 언급되는데요. 고려의 두건은 문라를 중히 여겨 건 한 개가 쌀 한 섬(石) 값이 되어서 가난한 백성은 이를 장만할 밑천이 없었다고 합니다. '라'라는 소재는 3-4올의 경사를 교차하면서 그물처럼 짠 직물인데요, 고대로부터 백라(白羅), 오라(烏羅) 등으로 관모에 사용되던 소재입니다. 통일신라시대에는 흥덕왕 복식 금제령에서 사용을 제한할 정도로 유행한 소재이기도 합니다. 고려시대에는 그 종류가 다양해지고 문양도 다양해져서 의복뿐만 아니라 교역품으로도 많이 사용된 대표적인 직물입니다. 지금 보시는 것이 고려시대 불복장 직물 가운데 문 라인 데요, 그물과 같은 바탕 조직에 변화를 주어 문양을 표현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고려 남자의 건(巾)은 여러 종류가 있었습니다. 『고려도경』에 의하면, 진사(進士)는 '사대 문라건(四帶文羅巾)'을 농민과 상인은 베[布]로 만든 '오 건 사대(烏巾四帶)'를, 나라의 관료나 귀인들도 사가에서 생활할 때에는 '두건 양대[頭巾以兩帶]'를 썼다고 합니다. 두건 양대는 2개의 끈이 달린 두건으로 해석되기도 하는데요, 관료나 귀족임을 알리는 표징이 되기도 해서, 이와 같은 건을 쓰고 가는 사람을 거리에서 만나면 향리들이나 백성이 피했다고 합니다. 지금 보시는 것처럼 고려시대 청동거울 뒷면에서 인물이 쓴 건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제현의 초상화와 안향의 초상화에서도 건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데요, 특히 안향이 쓴 모자는 위가 평평하다고 해서 평정 건이라고도 불립니다. 발립은 개체 변발한 머리에 씌워졌던 모자로 몽골풍의 모자입니다. 정수리 부분이 둥글고 챙이 달려있는 것이 특징입니다. 이조년(1269-1343)의 초상화에서 발립의 모습을 확인하실 수 있는데요, 구슬을 꿰어 만든 장식용 갓 끈이 턱 아래로 드리워진 모습도 볼 수 있습니다. 발립을 착용한 남자들의 모습은 원대 회화에서 자주 등장합니다. 원대의 발립은 명대가 되면서 모정이 높아지는데요, 이처럼 모정이 높아진 발립을 쓴 고려 남자의 모습이 고려 말기 박익(1332~1398) 묘 벽화에서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 그림에서 남자가 쓴 발립은 정수리 부분이 둥글지 않고 수평인 것이 특징입니다. 고려시대 남자의 신발은 고대와 마찬가지로 '신목이 있는 화(靴)'와 '신목이 없는 이 또는 혜'라는 두 가지 형태를 기본으로 하고 있습니다. 지금 보시는 것처럼 박익 묘 벽화에서는 단령을 입은 남자가 화를 신은 모습이 확인됩니다. 또 『고려도경』에는 하급관리의 이가 등장하는데요, 진사(進士), 산원(散員), 민장(民長)과 같은 하급관리는 혁리(革履), 오혁 구리(烏革勾履) 등의 신목이 없는 가죽신[履]을 신었고, 평상시에는 짚신[草屨]을 신었다고 합니다. 한편, 고려시대 남자의 평상복 모습을 관찰할 수 있는 또 다른 자료로서, 서울 방배동에서 출토된 목우상을 들 수 있습니다. 공개된 목우상은 크기가 대략 7~8cm 정도인데요, 2점의 남자 목우상은 포를 착용하고 공수를 한 모습입니다. 지금 보시는 것처럼, 바닥까지 닿을 듯한 긴 포를 착용하고 허리에 대를 매고 있는 모습입니다. 또 다른 1점의 목우상은 뒤로 머리를 길게 늘어뜨렸습니다. 이 목우상은 소년의 모습으로 추정하기도 하는데요, 고려시대의 미혼남녀가 모두 상투를 틀지 않고 머리를 늘어뜨렸다는 점에서 미혼여성의 머리 모양을 설명하는 자료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머리카락을 뒤로 가지런히 길게 늘이고 있으며 그 길이는 무릎에 닿을 정도입니다. 이상에서 살펴본 3점의 목우상은 모두 곧은 깃의 우임이며 바닥에 닿을 정도로 길이가 긴 포를 입고 있는 모습입니다. 허리에 대를 매었고 앞으로 늘어뜨린 모습입니다. 그리고 소매는 직배래의 통수이며, 수구는 양손을 공수할 수 있을 정도로 넓은 편입니다.
마지막으로 고려시대 남자의 장신구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고려는 경제적으로나 문화적으로 발달된 사회였기 때문에 이 시기에 장신구의 패용이 상당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러나 무덤에 부장품을 넣는 풍습이 적은 탓에 그 내용을 상세히 파악하기는 어렵습니다. 현존하는 국내외 고려 복식 관련 장식 가운데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지금 보시는 유물들처럼 의복에 부착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금속제의 작은 투각 장식들입니다. 비교적 작은 것은 쌍으로, 큰 것은 단독으로 발견되는 경우가 많은데요, 새, 물고기, 꽃 등의 자연물들이 줄기와 어우러져 구불구불한 형태로 얽혀 투각 되어 있습니다. 단추 종류의 장식이 아닐까 추정되지만 정확한 것은 알 수 없습니다. 지금까지 고려시대 남자의 평상복에 대해 함께 공부해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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