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 왕과 백관의 관복 제도의 변천 과정을 이해하고 고려시대 남자의 평상복 종류와 형태에 대해 설명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고려시대 복식을 공부하기에 앞서서 먼저 고려시대의 시기 구분에 대해 개관하면서 각 시기별로 중요한 복식사적 사건들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고려는 918년 왕건에 의해 건국되었고 1392년 이성계에 의해 멸망하기까지 475년간 존속했습니다. 지금까지 한국사 연구에서 고려왕조의 시기 구분에 대해서 다양한 견해들이 제시되어 왔는데요, 무신정변을 기준으로 전기와 후기 두 시기로 구분하는 경우가 있고, 지배 세력의 변화에 따라 더욱 세분하여 네 시기로 구분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데 복식사적 측면에서 볼 때는, 고려시대 복식의 변화를 이해하는 데에는 고려시대를 전·중기, 원 간섭기, 말기 이렇게 세 시기로 나누어 살펴보면 이해하기가 쉽습니다. 고려 전·중기는 태조 원년부터 원 간섭기 이전, 즉 고종 45년(1258) 무렵까지 약 340년의 시기입니다. 전기는 10세기부터 11세기까지로 이 시기에는 지배구조의 성립과 발전이 이루어집니다. 중기는 12세기부터 13세기 중반까지 인데요, 이 시기는 사회 변화와 항쟁의 시기로서 무신정변으로 문벌귀족사회가 붕괴되고 몽골의 침입과 항전이 있었던 시기입니다. 고려는 건국 초기에 통일신라의 의제(衣制)를 그대로 답습했습니다. 그러나 4대 광종 대(949~975)에 이르러 나름의 의제를 확립하기 시작합니다. 이때 백관의 공복을 정해서 상하 존비를 가리게 되었는데요, 이 관복 제도는 자·단·비·녹 이렇게 4색의 관 품을 표시하는 것이었습니다. 이후 고려의 복식제도는 송, 거란/요, 그리고 금의 영향을 받게 됩니다. 또 의종 대에 이르면(1146~1170) 조종의 헌장을 모으고, 당의 제도를 가려서 만든 예제인 상정 고금례가 완성되는데요, 그 내용이 고려사 여 복지에 남아있어 고려 복식을 연구하는데 활용되고 있습니다. 다음은 원 간섭기입니다. 고려는 고종 46년(1259) 몽골과 강화를 맺은 이후부터 공민왕 5년(1356) 반원 개혁이 성공할 때까지 약 97년간 원의 간섭을 받았습니다. 이 시기는 복식에 큰 변화가 있었던 시기인데요, 변발과 호복과 같은 몽고풍의 영향이 매우 컸습니다. 고려 말기는 공민왕 6년(1357)부터 고려 왕조가 멸망하는 1392년까지로 볼 수 있습니다. 이 시기에 중국에서는 왕조 교체가 일어나는데요, 원이 쇠퇴하고 1368년 명이 세워지게 됩니다. 원의 굴레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움직임은 중국에 새로 등장한 명에게 관복을 청하는 외교적 행위로 표현되기도 했는데요, 따라서 고려 말기에는 명 복식의 영향이 나타나는 경향을 보입니다. 고려시대 복식에 관한 자료는 그 종류와 수가 비교적 적은 편입니다. 『삼국사기』, 『고려도경』, 『고려사』, 『고려사절요』 등의 문헌 자료와 더불어 고려불화, 초상화, 벽화 등의 회화 자료, 목우상(木偶像)과 같은 조각품, 불복장 유물을 통해 고려시대 복식의 종류와 형태를 추정하고 있습니다. 고려의 관복을 이해하는 데에는 『고려사』가, 그리고 고려의 의생활 풍속을 이해하는 데에는 『고려도경』이 매우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고려도경』은 인종 원년(1123)에 송의 사신 일행으로 고려에 온 서긍이 저술한 기록인데요. 고려에 대한 종합적인 정보를 기록한 보고서입니다. 『고려도경』은 원래 글과 그림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나 안타깝게도 그림 부분은 전해지지 않고 글 부분만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려시대 복식에 관한 가장 중요한 기록 자료로서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습니다. 실물자료로는 불복장 유물이 매우 중요합니다. 고려는 국교로서 불교를 공인한 국가인데요, 그래서 왕실부터 일반 백성에 이르기까지 불교가 많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14세기에 불상을 만들면서 불상 안에 각종 복식과 직물류를 넣어두었습니다. 현대에 들어 불상을 개보수하면서 부처님 뱃속에 있는 유물을 발견하게 되었고, 이로 인해 고려 후기의 복식 문화를 관찰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먼저 고려시대 왕의 복식에 대해 공부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고려사』 여복지에는 왕의 관복이 제복(祭服)과 조복(朝服) 두 가지로 나누어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 왕의 공복(公服), 상복(常服), 연복(燕服)에 대해서는 『고려도경』의 기록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왕의 제복을 살펴보겠습니다. 고려의 왕은 체례(禘禮), 즉 천신(天神)과 조상에 대해 지내는 나라의 큰제사 때에 면복(冕服)을 착용했습니다. 면복은 면류관과 곤복으로 구성된 관복인데요. 면류관은 앞과 뒤에 구슬 줄을 늘어뜨린 관모이고, 곤복은 옷의 표면에 제왕의 도리를 상징하는 장문을 그림이나 자수로 표현한 옷입니다. 이 면복은 고대 중국에서 생겨나서 한족(漢族)의 전형적인 관복이 되었는데요, 한족의 문화권이 광대해지면서 동아시아 지역에서 황제와 국왕의 관복으로 인식되어 왔습니다. 황제는 12류면 12 장복, 여러 왕들은 9류면 9 장복 이하의 제복을 착용했습니다. 『고려사』 에는 인종, 의종, 공민왕 대의 왕의 제복 기록이 남아있습니다. 그 내용을 같이 한번 읽어 보시겠습니다. “인종 18년(1140) 4월에 조서로서 체례(禘禮)의 복장을 정하니, 왕은 9류 면관을 쓰고 7 장복을 입도록 하였다. ” (『고려사』 여 복지) “의종 조에 자세하게 정하였다. 무릇 원구, 사직, 태묘, 선농의 제사에는 곤복을 입고 면류관을 쓴다. 9류의 매 류에는 12개의 옥을 꿰었는데, 그 옥은 적색, 백색, 창색 구슬을 엇바꾸어 꿰었으며 곤복의 현의에는 5장으로 산, 용, 화충, 화, 종이를 그려 넣었고, 훈상에는 4장으로 조, 미, 보, 불을 수놓는다. ” (『고려사』 여 복지)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상의 기록에서 고려 전·중기 왕의 제복을 확인할 수 있는데요, 인종 대에는 왕의 제복이 '9류면 7 장복'이었던 반면에, 의종 대에 완성된 상정 고금례에서는 왕의 제복을 '9류면 9 장복'으로 정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9류면 9 장복'은 중국의 친왕례(親王禮)에서 가장 높은 등급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의종 대의 면류관은 9개의 줄에 달린 옥구슬의 숫자가 한 줄 당 12개였고, 옥의 색은 적색, 백색, 창색(푸른색)이었습니다. 그리고 곤복은 9 장복이었는데요, 의에는 5개의 문양이 그림으로 그려져 있고, 상에는 4개의 문양이 자수로 장식되었습니다. 또 다음의 기록을 같이 한번 보실까요? “공민왕 19년 5월에 [명] 태조 고황제가 면복을 사여하였는데 면류관은 청색 구슬[靑珠]을 꿴 '9류'였으며, 청의(靑衣)와 훈상(纁裳)에는 '9장'이 그려지거나 수놓아졌다. ” (『고려사』 여 복지)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기록에서 고려 말기 왕의 제복을 알 수 있습니다. 공민왕 19년(1370) 5월에 고려와 명 사이에 정식 외교 관계가 성립되면서, 공민왕을 고려의 왕으로 책봉하는 고명과 함께 이 9류면 9 장복이 사여 되었습니다. 이때 면류관에 꿰어진 구슬의 색은 청색이었는데요, 곤 복도 같은 청색인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고려사』의 기록에서는 빠져있지만, 『조선왕조실록』 세종 26년 윤 7월 23일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습니다. “고려 공민왕 때에 참람되게 12장 문의 옷을 입고, 물건들에 황색을 사용하였다. ”라는 기록입니다. 이 기록은 원의 세력이 쇠퇴했던 시기 공민왕이 자주성을 모색하기 위해서 9류면 9 장복 대신 황제와 동격인 12류면 12 장복을 착용했다는 내용입니다. 이처럼 고려는 중국에 강자가 존재하지 않았을 때 황제국을 표방하면서 자주성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앞서 기록에서 보신 것처럼 공민왕 19년(1370)에 명에서 9류면 9 장복을 사여 받으면서 황제 격의 제복 제도를 오래 유지하지는 못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지금 보시는 고려 불화에서 고려 왕의 면복을 추정해 볼 수 있는데요, 머리에 면류관을 쓰고 있고, 현의를 입고 있으며, 손에는 부속 의물인 규(圭)를 들고 있습니다.
다음은, 왕의 조복입니다. 왕은 정월 초하루와 동지, 절일(節日)의 조정 하례와 팔관회와 연등회 등의 연회 시에 조복을 입었습니다. 『고려사』에 기록된 왕의 조복 기록은 주로 색상에 대한 내용이 많습니다. 고려 전·중기와 원 간섭기 왕의 조복은 주로 '황색' 계열이었습니다. 건국 초기[國初]에는 왕의 조복으로 자황포(柘黃袍)가 사용되었습니다. 이 자황 색(柘黃色)은 붉은 기운이 도는 황색을 의미하는데요, 의종 조 상정 고금례에서는 정월 초하루와 동지, 절일의 조정 하례와 팔관회와 연등회 같은 큰 연회 때에는 자황포(赭黃袍)를 입고, 작은 연회일 때는 치황의(梔黃衣)를 착용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후 원 간섭기 때는 고려가 원 황실의 간섭을 받게 되면서 왕실 칭호와 관제를 낮추어 바꿀 것을 요구받게 됩니다. 충렬왕 27년(1301) 5월에는 “복색이 원에 비견된다”는 이유로 고려 왕의 조복 색상을 자색[赭: 붉은색]에서 지황(芝黃)으로 대체하게 됩니다. 그러나 충렬왕 30년(1304) 2월 왕이 원나라 사신에게서 원 조정에 복색에 관한 명확한 금법이 없다는 말을 전해 듣고는 다시 황포(黃袍)와 황산(黃傘)을 쓰게 되었습니다. 또 『고려사』에는 공민왕 19년 5월, 명에서 사여 된 왕의 조복 일습에 관한 기록이 있는데요, 이를 통해 고려 말기 왕 조복의 구성 품목을 파악해볼 수 있습니다. 기록을 같이 한번 읽어 보시겠습니다. “공민왕 19년 5월에 [명] 태조 고황제가 원유관(遠遊冠)을 하사하였는데, 7량에 금을 입힌 박산(博山)을 가하고 매미 7마리를 붙였으며, 비취 구슬을 달았고, 무소뿔 비녀를 꽂았다. 강사포(絳紗袍)와 홍상(紅裳), 흑색 깃에 청색 선을 두른 백색 사(紗)로 만든 중단(中單), 군(裙), 유(襦), 사(紗)로 만든 폐슬(蔽膝), 백 가대(白假帶), 방심곡령(方心曲領), 금고리가 달린 홍색 혁대, 백색 버선[襪], 흑색 석(舃)을 사여하니 여러 신하들의 조하를 받을 때 입었다. ”라는 기록입니다. 이 기록에서 왕의 조복은 '원유관과 강사포'로 요약되는데요, 고려 말기 왕의 원유관은 7개의 줄이 있는 양관(梁冠) 형태였습니다. 그리고 기록에서 강사포는 붉은색의 포를 의미합니다. 고려 왕의 조복은 고려 불화에서 그 모습을 찾아볼 수 있는데요, 지금 보시는 그림은 충선왕 4년(1312)에 그려진 「관경서 분변상도」의 일부입니다. 가운데에 왕으로 추정되는 인물의 모습에서 박산이 장식된 원유관, 방심곡령, 황색 계열의 포, 홍색 상(裳), 폐슬, 붉은색의 대 이런 것들을 관찰할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왕의 공복을 살펴보겠습니다. 공복은 왕이 중국 사신을 맞이할 때 입는 옷이었습니다. 고려 왕의 공복에 대한 기록으로는 『고려사』에 문종 32년(1078)에 송나라 신종(神宗)으로부터 자색 공복[紫花羅夾公服]을 사여 받았다는 내용과 『고려도경』에서 중국 사신을 맞을 때 왕이 자색 라[紫羅]로 만든 공복(公服)에 옥대(玉帶)를 띠고 상홀(象笏)을 들었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고려 전·중기 왕의 공복 착용 모습은 남아있지 않기 때문에 송 신종(神宗)의 공복 착용 모습을 통해 고려 왕의 공복 구성을 유추해 볼 수 있습니다. 신종의 공복은 붉은색 단령과 검은색 복두, 그리고 허리띠와 검은색 화로 구성되었습니다. 노국공주와 공민왕의 초상화에서도 고려 말기 공민왕의 공복 착용 모습이 보이는데요, 이 그림에서 공민왕은 자색 단령이 아니라 송나라 신종처럼 붉은색 단령을 입고 홀을 들고 있습니다. 그러나 송 신종과는 달리 공민왕의 단령에는 깃과 수구에 검은색 선이 대어져 있습니다.
다음은 왕의 상복(常服)입니다. 상복은 왕이 평소의 집 무시에 착용하는 옷입니다. 고려 전·중기 왕의 상복에 대해서는 『고려도경』에 기록이 있는데요, “오 사고모(烏紗高帽)를 쓰고 담황색의 착수포[窄緗袍]를 입고 금실과 푸른 실[金碧]로 수가 놓인 자색라의 허리띠[紫羅勒巾]를 맨” 모습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송사』에 의하면, 송 황제의 상복은 오 사절 상건(烏紗切上巾)에 자황이나 담황색 착수포를 입고 문양이 있는 검은색 화[皂文靴]로 구성되었습니다. 고려 왕과 송 황제의 상복은 별 차이가 없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후 원 간섭기에 들어서면 고려의 왕은 상복으로서 원나라 복식인 질손을 착용했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이 질손은 원사 여 복지에 의하면 일색복(一色服)을 말하는 것이며 내정 대연(안뜰에서 열리는 큰 연회) 때에 착용하는 예복입니다. 질손은 여름용과 겨울용이 달랐으며, 위로는 큰 공을 세운 대신이나 황제를 모시는 근시(近侍)에서부터 아래로는 악사(樂士)에 이르기까지 모두 착용한 옷이었습니다. 특별히 정해진 규정은 없으나 정교함과 거친 정도에 따라 상하를 구별했다고 합니다. 공민왕이 직접 그린 천산대렵도에서 질손의 형태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개체 변발을 한 기마 인물의 옷은 상의와 하의가 같은 색으로 연결된 원피스 형태이며, 허리 아래 부분에서 주름이 잡혀 있습니다. 다음은 고려시대 왕의 연거복입니다. 『고려도경』에는 “고려 왕이 평상시에 검은색 건[皂巾]에 백 저포(白紵袍: 흰모시 포)를 입어서 백성과 다를 바 없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왕의 연거복은 검은색 건과 백저포 차림이 기본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고려시대 왕의 복식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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